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예.누.3)(요10:1-10)

작성자
김미정
작성일
2024-03-20 09:41
조회
62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0:7-10)

*양의 문은 무엇일까?

①예수님 시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문 중 양들이 들어가는 문을 양의 문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십자가의 길이 시작된 곳이다. 사자문, 스데반의 문이라고 불렸다.

②밤에 양들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 양을 넣는 양우리에 들어가는 문. 돌담으로 울타리를 했다. 출입구에 양의 목자가 밤새지키고 있다. 양우리의 출입구가 비어 있기에 우리 입구를 막고 앉아있는 목자는 양의 문이기도 하다. 또한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목자다. 양의 문을 지나가야 목자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둑이요, 강도라 한다. 예수님은 나는 양의 문이라고 선언하신다.

*당시...

당시 목자는 꼴을 먹이기 위해 멀리 양들을 데리고 나가야 했다. 때로 수키로. 목자들은 가난했기에 들판에 공동 우리를 짓고 양을 넣고 돌아가며 지켰다. 아침이 되면 목자들이 자신의 양을 찾으러 온다. 목자를 우리 안으로 통과시켜주면 들어가 자기의 양을 찾아갔다. 자기의 양을 찾는 쉬운 방법은 양을 부르는 것이다. “애들아, 밥 먹으러 가자!” “메에~주인님~” 목자 소유의 양들은 주인을 따라 초원을 향해 나갔다. 양을 확인할 필요가 없다.

*새 양 길들이기

케네스베일리(중동문화 전문가)의 인터뷰. “새 양을 사면 목자의 음성 듣는 훈련이 있는가?” 방법이 있다. 새 양을 사서 우리에 넣고 14시간을 굶기는 것이다. (간헐적 단식) 배고픈 양들은 신경질을 내고 고통스러워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기진맥진, 자포자기한다. 그때 먹이를 준다. 폭풍흡입. 매일 이렇게 일정 시간 반복하다보면 양들은 신경쇠약에 걸린다. 오직 양의 목자 소리만 들린다. 의도적인 훈련을 통해 주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 양들이야말로 주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목자의 소유가 된다.

*양의 문이신 예수님께 들어가야 하는 이유

①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는다.

“내가 문이니...” I am the gate ( the=the one. 유일한)

②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가는 은총을 입는다.

들어가며 나오며(출입), 이동할 수 있고, 자유를 의미한다.

(요9장) 태어나면서 볼 수 없었던 사람. 소경의 등장. 안식일날 소경을 고쳐주심. 예루살렘과 바리새인들이 발칵 뒤집힘.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예수님을 고발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고 부정한다. 소경은 그분이 메시야임을 믿었기에 출교당한다. 이것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생매장시킨 것을 의미한다. 공동체 밖으로 보냈다. 이제 생명과 안정에 대한 보장이 없어졌고 가족과의 대화도 불가능해졌다. 평생 말씀을 한 번도 읽지 못했던 자. 그가 영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 반대로 영적인 눈이 닫혀진 바리새인들은 영적인 소경이였다.

*지독한 근시 양

소경은 말씀을 읽은 적이 없다. 양이 주인을 따르듯 그가 주인을 알고 따랐다. 바리새인들은 613개의 조항이 있었고 이 조문을 날마다 지켜려했다.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게 된다. 그리스도는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완성)이 되었다. 우리가 율법을 다 지켰다 해도 우리의 생각은 날마다 범죄한다. (형제를 라가라, 바보라하면. 음욕의 생각도 죄가 된다) 인간은 죄로 자유로울 수 없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예수님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양의 문이다. 이 땅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도 유효하다. 놀라운 자유를 얻었다.

③이 땅에서 더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려고

꼴을 얻으리라.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신다. 이 땅에서도 주님의 은혜를 더 풍성히 누리도록 하신다(원하신다).

*풍성한 삶 ≠ 경제적 문제가 해결?≠육체의 질병 치료?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에 응답하시고 도우시며 궁극적으로 해결하신다. 하지만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우리는 문제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하심을 잊어버리곤 한다. 주님은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지켜주신다. 우리의 매일 아침 출입(등교, 출근)을 지키신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사실! 그것을 믿을 때 우리는 풍성한 삶을 누린다.

*하나님께 열심인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조항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려 날마다 애를 썼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행위를 하나님의 의를 버리고 바리새인들의 의를 세우기 위한 것, 불순종하는 것이라고 책망하신다. 반대로 평생 말씀 한번 눈으로 읽지 못했던 소경은 그의 눈이 열리자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르는 자가 되었다. 참 아이러니한 장면이다. 눈은 뜨고 있지만, 하나님을 안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열심을 내는 바리새인들은 영적인 소경이라 주님께 책망을 받는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참 신앙은 정말 어려운 것이구나 생각이 든다. 마치 백지 한 장처럼, 하나님께 열심을 내어도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지, 아니면 나의 만족과 나의 의를 구하는 것이지 말씀 앞에서 점검하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 같다. 때로 나의 의를 세우는 연약함과 어리석을 때도 많지만, 그럼에도 주님을 부를 때 응답하시고 나의 출입을 지키시며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의 길을 인도하시는 은혜의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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