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말 (목사님 주일 말씀을 듣고)

작성자
윤휘종
작성일
2021-09-26 17:26
조회
422
<성령과 말> 2021.09.26(주) 

 

미디어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창세기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언어와 아담의 언어를 비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만큼은 '말씀'으로 창조되지 않고, 대신에 하나님의 '숨'(루아흐)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말씀'으로 창조된 피조물과 '호흡'으로 창조된 아담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언어'로 무엇을 규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지배'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말씀'으로 창조된 피조물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렇기에, 구약 시대에도 히브리 민족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어서, 아도나이(나의 주님)로 부르곤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전통적으로 부모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금기시되었습니다.

반면에 '말씀'이 아닌 '호흡'으로 창조된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지위를 갖습니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에 의해 지배를 받는 창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인 '자유의지'를 물려받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는 창조물입니다. 그와 같이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세를 누립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위를 갖는 아담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물에 '이름'을 붙입니다. 동식물에 '이름'을 붙이는 아담은 하나님의 수준까지는 못 미치겠지만,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권세를 누립니다. 그렇게 인간은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심히'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숨(성령)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죄로 우리 안에서 끊겼던 하나님의 숨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회복되었습니다. 과연, 우리 안에 하나님의 숨(성령)이 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고 가는지를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현상을 보고 바람이 불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정확히 언제 내 안에 임재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의 고백을 통해 내 안에 성령이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고백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 부활을 통해 내가 구원받았음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호흡마저도 다 주의 것이니"라는 찬양의 가사가 있습니다. 언제 우리는 '호흡'을 하게 되나요? 바로 '말'을 할 때입니다. 말을 할 때, 우리는 호흡을 내뱉습니다. 그러므로 '호흡'의 주권이 주께 있음을 인정하는 자는 '말'의 주권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말(호흡)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 부활'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좀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이라면, 자신의 호흡(말)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언어가 곧 우리의 언어이어야 합니다.

성령의 언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지 '방언'만을 일컫지 않습니다. 방언은 본질이 아닌, 여러 종류의 현상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성령의 언어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이자, 내 모든 삶의 주권이 예수께 있다는 전인격적인 선언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목사님의 설교 말씀, 순모임에서의 고백 모두 성령의 언어, 하나님 나라의 방언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입니다. 한국 사람조차 같은 한국말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성령이 없다면, 한국말로 표현된 성령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지배하는 언어는 성령의 언어가 아닌, 육신의 언어, 세상의 언어, 돈의 언어, 약육강식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태신자들이 설교 시간에 졸음을 이기지 못 합니다. 그들이 성령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 우리의 능력으로는 성령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말씀이 들리는 현장은 성령이 역사하시는 현장입니다.

한국 사람과 독일 사람은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언어를 사용한다면, 그러니까 성령의 언어, 곧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서도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받은 은혜는 잊은 채로, 남이 나에게 끼친 피해만을 생각하고, 자기의 관점으로 남을 바라보고, 자기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앞세운다면, 공동체 안에서도 소통은 불가능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공동체 안에서 갈등과 다툼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대화가 통한다는 것은 마음이 통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통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언어가 필요합니다. 배려하고 섬기는 언어, 타인의 약함을 보듬는 언어,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는 언어, 나의 강함을 자랑하지 않는 언어, 어려움을 겪는 자를 응원하는 언어, 연약한 자를 세우는 언어, 상처받은 자를 위로하는 언어가 거듭난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신앙 생활을 할수록 "사나워지기보다는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그것은 구원의 '근거'는 아니지만, 은혜를 입은 자가 마땅히 보여야 할 '반응'입니다. 

한 사람의 말을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은 점점 길어지고 있는데, 제 입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드러나는지, 제 호흡(말)에 성령의 열매가 담겨있는지를 점검해보면, 많이 부끄럽습니다. 우리가 험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단지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러한 거친 말을 내뱉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품격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호흡에 성령의 품성(보살핌, 위로함, 가르침)이 드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연합하고 사랑하는 우리 공동체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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