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윤휘종 윤휘종
작성일 2020-06-24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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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일반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신명기 5장 20절-

오늘 새벽예배 본문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보통 십계명 중 제9계명을 "거짓말하지마라"고 이해한다. 이웃에 대한 거짓 증거도 넓은 범위에서 거짓말에 속하기 때문에 "거짓말하지마라"고 이해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뒤에서 말을 옮기거나 험담을 할 때 그것을 사실로 여기며 거짓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그에 따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거짓말의 범위를 좀 더 엄격하게 할 필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신앙의 성숙이란 나에겐 엄격하고 타인에겐 관대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거짓말의 범위를 뒤에서 옮기는 말 혹은 험담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뒷말의 대부분은 '사실이라 착각하는 것이지' 사실을 가리킬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내뱉은 말이 사실과 다르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이것을 이번시간에 과학철학과 함께 알아보도록 하자. 과학철학자 차머스는 과학과 관련한 우리의 오해를 소개한다. 첫째는 "감각을 통해 얻어진 사실은 과학자에게 편견 없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둘째는 "과학적 사실은 이론에 독립되어 있고 이론보다 앞서있다"는 것이다. 다음 문단에서 각각의 오해에 대해 응답하겠다.

  첫째로, 우리의 감각은 완전하지 않다. 우리는 감각 중 시각에 많이 의존한다. 우리는 시각을 통해 확인한 정보가 사실이라 믿는다. 그러나 사람마다 같은 대상을 봐도 갖는 시각적 경험이 다르다. 시각만큼 사람이 속기 쉬운 것도 없다. 예를 들어,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그림을 보면, 같은 그림을 보아도 누구는 그 그림을 토끼로 보고 누구는 오리로 본다. 또, 한 사람의 X-ray 사진을 보고 정형외과 의사는 아무런 병을 발견하지 못하지만, 류마티스 내과 의사는 강직성척추염이란 병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시각 경험은 관찰 대상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가 갖고 있는 배경, 정보, 지식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다.

  둘째로, 사실은 이론에 의존적이라는 것이다. 사실이 지식에 앞서 있지 않고 지식에 따라 사실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지동설이 입증되기 전, 천동설은 관찰에 의해 입증된 사실이었다. 우리가 자리에서 뛰어도 지구가 돌기 때문에 뛰었던 자리보다 뒤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의 지식이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상황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우리가 실험, 관찰을 통해 얻은 사실은 틀릴 수 있다. 왜냐하면 사실은 이론의존적(Theory-laden)이고 지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차머스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우리가 갖고 있는 배경에 의존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까마귀는 검다"란 주장 A라 맞는지를 확인하려면, 실제로 많은 검은 까마귀를 발견하면 된다. "모든 까마귀는 검다"란 주장 A는 "검지 않은 그 어떤 것도 까마귀가 아니다"는 주장 A*과 같다. 두 주장이 같다는 것은 A가 참인데, A*가 거짓인 경우가 없고, A가 거짓인데, A*가 참인 경우가 없다는 것이다. 즉 A와 A*는 동시에 참이거나 동시에 거짓이다. A와 A*는 같은 주장이기에 검지않고 까마귀도 아닌 것을 발견하면 A주장의 신뢰도가 올라간다. 실제로 검지도 않고 까마귀도 아닌 것은 무수히 많다. 예를 들어, 흰 운동화를 발견하면 발견할 수록 A주장의 신뢰도는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집밖에 나오지 않고 책에서 검은 것은 까마귀와 운동화가 전부라고 배운 어린 아이가 있다는 사유실험을 해보자. 그 아이가 어느날 집에서 나와 마트에서 흰 운동화를 보게 되면, 그 아이는 모든 운동화는 검지 않고, 흰 까마귀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까 '흰 운동화'가 우리랑 다르게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주장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어떤 배경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내가 관찰한 사실이 주는 정보가 다른 것이다.

  객관적 사실로 여기는 과학도 이러한데, 하물며 인간사는 어떠하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일부의 정보, 배경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해 '사실로서 여기는' 정보는 그 사람에 대한 더 나아간 정보에 의해 반박되거나, 우리가 다른 판단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우리는 종종 "사람이 달라보이네요"란 말을 사용한다. 이는 우리가 갖고 있는 정보나 배경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이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다. 예를 들어, 학창시절에 나를 본 친구들은 내가 철학을 전공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학창시절에 나는 철학이 주는 이미지처럼 고상하지 않았고 축구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대학에서 나를 만난 사람들은 내가 축구를 좋아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대학시절의 나는 신문기사를 썼기에 정적인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가 가진 정보에 따라 한 사람에 대한 판단은 달라지는 것이다.

  누군가에 대해 갖는 정보는 평판과 소문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평판과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관찰하여 얻은 정보일지라도 오류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남에게 들은 말은 절대로 믿지 말고 직접 본 것은 반만 믿으라"는 말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 대한 나의 판단이 전적으로 옳다고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목사님께서 추천하신 책 중 이승우의 <생의 이면>이란 책이 있다. 그 책에서 주인공은 매우 큰 잘못을 저지르는데, 그런 행동은 유년시절 상처에서 비롯된 분노로 인함이었다. 물론, 그 사람의 범죄가 그 사람의 상처로 인하여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할 수는 있게 한다. 모든 사람은 생의 이면이 있다. 모든 사람은 상처를 입은채 살아간다. 때로 그 사람의 이해못할 행동도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나면, 그 사람의 상처를 알고 나면, 그 사람의 간증을 듣고 나면 이해될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의 잘못을 더 수월하게 감싸준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우리는 알 수 없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소문을 듣고 바로 말을 옮기기보다, 그 사람의 내면을, 그 사람의 상처를 내 가족처럼, 내 사람처럼 이해하고자 시도해보는 것은 어떨까?

  당신이 지금 그 사람에 대해 하고 있는 말은 진실인가? 이전 것은 지나갔다. 어리석은 자는 과거를 살고 지혜로운 자는 오늘을 산다. 어제의 쓴 뿌리는 끊고 오늘 그 사람의 진심을 받아들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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