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봄의 문을 여는 목사님 새벽예배 말씀 모음

작성자
윤휘종
작성일
2020-03-31 15:20
조회
474
2020.03.02(월) 새벽예배말씀 
본문: 요한복음 6:1~15

표적: 기적은 단순히 초자연적인 현상을 가리키지만, 표적은 그러한 현상을 통해 예수께서 창조주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그분을 통해 이 땅이 회복될 것임을 가리킨다.

9절: “한 아이가 있어...”

가장 적은 것, 초라한 것으로 예수님은 표적을 행하신다. 그것 없이도 능력을 행하실 수 있으시고, 그것 없이 한다면 더 사람들이 놀랍게 여길 수도 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나오듯 그분은 태초에 말씀과 함께 계셨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분이 무언가를 기대하시고 기다린다. 한 아이의 희생을 기대하신다. 그런 것 없이도 만나를 내리게 하실 수 있는 분이, 말씀만으로 역사하기는 분이 기다리신다.

그분의 구속사, 거룩한 계획 속에 연약한 나를 통해 역사하시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주님 혼자 이룰수도 있지만,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끊임없이 가르치시고, 성령을 통해 깨닫고 함께 사역할 수 있게 하셨다.

주님 홀로 하실 수 있으신데 왜 나같은 사람을 불러주시고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나를 통해 역사하기 원하실까?

주님은 우리에게 무능하고 하찮다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너없이 안된다 하신다. 그 사랑을 알기에 약하고 매번 넘어지지만 순복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역사하시고자 함이 얼마나 감사한가?

나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주권적인 역사이다. 이제는 세상의 구원을 향해 나와 함께 하시고자 한다.
오늘도 나를 통해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들이 존귀하게 성취되길

사람들은 기적만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고자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도 연약한 나를 통해 당신의 계획을 이루길 원하신다.

빌립을 향한 질문도 주님의 계획, 한 아이의 보리떡과 물고기를 기다린 것도 주님의 계획, 자신이 메시야임을 드러내시는 것도 주님의 계획.

오늘도 날 향한 주님의 계획을 감당하길 소망합니다.

2020.03.03(화) 새벽예배
말씀: 요한복음 6:16~21

본문에는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표적에 담긴 믿음을 보지 않고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쫓으나, 예수님이 더 이상 욕구를 채워주지 않자 그들은 예수님을 떠난다.

이후,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다. 예수님은 수시로 시간을 내어 성부 하나님께 기도했다.

날이 저물도록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고 제자들만 바다에 있었다. 그때 제자들은 풍랑만이 아니라 바다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줄 알아 두려워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두려움을 갖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두려움,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 질병에 대한 두려움 등등.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만날 때 자주 하시던 말은 샬롬, 평안할지어다

세상의 평화: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란 뜻인데, 이때의 평화는 힘에 의한 평화를 일컫는다.
세상의 평안은 환경과 조건에 의한 평안.
그러나 이런 세상의 평화는 한계가 있다. 영원한 힘은 없기 때문이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 영원하고 내적인 평안. 소유, 능력, 배경과 상관없는 평안

오늘 내가 겪는 두려움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두려움은 막연하다.

주께서 그곳에 함께 하길 원하신다.
주님은 안전하다 선언하신다.
인생의 주권자로 예수님을 모시는 삶, 그분의 통치 앞에 무릎 꿇는 삶, 내 힘이 아닌 그분을 의지하는 삶이 두려움을 불식시키는 삶이다.

오늘 하루 성령이 내재하심으로 참된 평안이 가득하길

2020.03.04(수) 새벽예배
말씀: 요한복음 6:22~29

오병이어의 기적 후, 무리는 예수님을 찾고자 헤맸다. 이튼날이 되자 먹고 사는 문제가 다시 일어난 것이다. 그들은 겨우 예수님을 만나자 성토하듯이 언제 이곳에 오셨나고 묻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동일한 문제를 경험한다. 그러나 성령은 마음 속에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평안을 주신다 말씀하신다.

썩을 양식을 갈망하는 무리(제자들도 마찬가지)가 무엇이 하나님의 일인가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대답하신다.

새벽기도도 소중하지만,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은혜에 따라 사역하는 것.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을 통해 내가 구원받았고 영생을 얻었다는 것, 날 향한 그분의 계획이 성취되었다는 것, 그분을 통해 회복과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

사울은 열심은 있었으나 예수를 믿지 못하여 핍박자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인생이 바뀌었다.

마르다/마리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이 일보다 우선됨.

모든 나의 바램과 갈망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죽으심과 부활에 감사, 감격하고 나의 욕구를 앞세우기 보다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기 힘쓰길

2020.03.05(목) 새벽예배
말씀: 요한복음 6:30~40

자신을 따르는 무리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을 표적이 아닌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찾는다고 도전하신다.

자신의 공급을 추구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으로부터 신앙이 시작할 수는 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은 그것을 넘어야 한다.

무리는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왔다면 모세처럼 만나를 먹이는 표적을 행해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만나를 공급한 것이 아니고 참된 만나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신다 말씀하신다.

*표적: 예수님의 예표, 모형
구약의 예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죽음이 넘어가듯이 구원은 우리의 공로나 행위 때문이 아니고 전적으로 예수님의 보혈에 달려있다.
-홍해: 갈라진 홍해를 건넌다는 것은 자신은 죽고 예수로 산다는 것.

매일 새벽 우리는 하늘로부터 내리는 만나로 산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공급받으며 살아간다.

믿는다는 것은 날 위해 찢기신 예수의 살을 먹고 날 위해 흘리신 피를 마신다는 것.

광야에서는 매일 만나를 먹어도 죽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산다. 영생의 근거가 되는 생명의 떡을 먹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말씀에 의해 산다. 은혜 아니면 한 순간도 살아가지 못 한다. 오늘도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생명의 말씀으로 삶 속에서 승리하는 역사가 가득하길

2020.03.06(금) 새벽예배
말씀: 요한복음 6장 41~51절

본문에는 하나님의 깊은 진리가 담겨있다.

오병이어의 기적
-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예수님은 그들이 굶주린 것을 보고 그들을 먹이고자 하셨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그분이 어린아이의 떡과 물고기를 기다리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의 공급만이 아니라 미약한 나를 통해 역사하시고자 한다.

-표적을 보인 후,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러 가셨다. 사람들이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고자 했지만 자신이 주는 생명의 떡은 십자가에서 찢겨야 함을 아시는 주님은 성부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바다 위를 걷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두려워한 제자들에게 “샬롬”이라 안심시키셨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생명 내놓아야 함을 아셨기에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을까.

- 군중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버나움까지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광야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도 죽었는데, 이 떡을 먹어서 얼마나 살겠느냐. 내 삶을 먹어야 영생한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의 일은 나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십자가까지 연결된다.

하나님께서 이끄셔야  예수님께로 갈 수 있다.

이단에게 빠지는 이유는 진리의 말씀을 모르기 때문이다.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영생을 가질 것이 아니라 이미 가졌다는 과거완료로 표현된다. 믿는 자는 영생을 이미 소유한 것이다.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
무엇이 정답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없다.

예수의 살과 피에 참여해 우리는 영원히 산다. 그럼에도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예수로 인하여 예수를 위해 사는 삶이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여 주님의 피흘리심과 부활에 응답하는 오늘을 올려드리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0.03.09(월) 새벽예배
말씀: 요한복음 6장 60~71절

육체의 욕구를 채우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삶의 목적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는 것,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이다.

빵을 먹고자 하는 군중에게 자신의 피와 살을 먹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도 어려웠다.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이 일치하지 않았다.

신앙이 목적이어야 하는데, 욕구의 수단이 되어버리면 곤고할 때 넘어질 가능성이 있다.

*63절: 예수님께서 살리고자 하신 것은 육체가 아니라 영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부활은 영적인 것이다. 그것은 육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아직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지 않아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바로 죽지 않고 600년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이미 죽은 것이었다.

64절: 예수께서는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이미 아셨다. 기회를 주지만 유다는 변하지 않았다. 생명이 있을 때는 기회가 있지만 죽음 이후에는 영원한 심판이 있다.

65절: 하나님의 은혜로 진리를 알고 진리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66절: 성경은 무리와 제자를 구분한다. 무리는 이해과 관심에 따라 모였다  흩어지는 군중이다. 제자는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전 삶을 포기한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제자가 떠났다는 말은 아픈 말씀이다. 그들은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했지만, 자신이 생각한 메시아와 예수님이 달랐기에 떠난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자신의 욕구를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다.

67절: 많은 사람들이 떠나는 순간 너희도 가려느냐는 예수님의 고백이 마음을 저미게 한다.  그때 베드로는 귀한 고백을 한다. 열정이 많은 만큼 실수도 많은 그이지만 참 감사한 고백이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그의 고백도 한계가 있다. 

오늘도 욕구가 아닌 말씀을 따라 믿음 가운데 굳세게 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0.03.10(화) 새벽예배
말씀: 요한복음 7장 1~9절

이스라엘 민족은 1년에 3번은 예루살렘에 방문해야 했다. 그들은 주로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에 방문했다.

1절: 예수께서 자신이 생명의 빵이라는 것을 증거한 후에, 유대인들의 노골적인 증오가 나타났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할 때에 올라가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오병이어가 진정한 초막절의 성취였기 때문이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의 광야생활 동안 함께 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하는 절기다. 광야의 만나는 예수께서 생명의 빵이 되신다는 것을 예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내리는 만나를 넘어 영생의 빵을 공습하시는 분이시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 자체였다.

6절: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 예수님의 때=>십자가. 가나 혼인잔치에서도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의 부탁에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거부하신다.  예수님의 사역은 십자가에 모든 초점이 맞춰있었다. 요한복음은 십자가를 영광과 연결시킨다.

어둠에 속한 세상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한다. 세상은 진리를 아는 데 어리석다. 세상은 비진리를 맹종한다.

진리를 아는 나는 진리를 아는 자 답게 행동하는가? 진리 앞에 순복하는가? 말씀 앞에 인격적으로 반응하는가?

2020.03.11(수) 온라인 새벽예배 
말씀: 요한복음 7장 10~18절

예수님께서는 초막절에 은밀한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왜 제자들을 먼저 보내시고 본인은 나중에 가셨을까?

제자들이 생각했던 영광과 예수님의 영광이 달랐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생각한 영광은 빵을 공급할 뿐 아니라 로마 이상의 제국이 건설되는 것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세상의 범주를 넘지 못했다.

예수님의 영광은 십자가였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내가 성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겠다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높아진다고 하나님께서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항상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만물을 창조하실 때나 이 땅에 내려오셨을 때나 주님은 동일하게 영광스러운 분이셨다. 그분의 가장 큰 영광은 십자가였다.

11절: 예수의 이름이 예루살렘 전역에 퍼졌다.
12절: 예수에 대한 여론이 사람들 사이에서 갈렸다.
13절: 사람들은 예수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평가를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14절: 예수께서는 아마도 초막절의 의미에 대해 가르쳤을 것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
15절: 예수께서 구약의 모든 말씀을 가르치실 때,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 “어떻게 나사렛 목수 출신이 저렇게 유식한가?”
16~17절: 예수께서는 자신이 가르치는 교훈이 본인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판단하라 도전하신다.

이단에 미혹되는 이유는 그 사람의 말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착각하기 때문이다.

자기 말의 특징은 자기 영광을 구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영광, 진리를 말씀하신다.

메신저는 말씀을 전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자기가 고상한 지식을 터득했다는 교만한 태도가 아니라 겸비하고 무릎 꿇음이 필요하다.

‘내가 가르친다’는 의식이 강해지면 자기 영광을 높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사람이 보내는 환호와 찬사가 항상 옳지 않다. 하나님이 인정하셔야 한다.

사람의 영광을 구하면 그 속에 거짓, 탐욕, 미혹, 불의가 있다.

나는 스스로 말하는 사람인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인가?

말의 변주만을 울리는가, 혼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말씀으로 인한 애통함이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가 나의 영광을 구하는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가, 나의 말을 앞세우는가?

오늘도 성령의 도우심에 따라 들려오는 말씀에 순복하는, 승리하는 삶을 살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0.03.12(목) 온라인 새벽예배
말씀: 요한복음 7:19~24절

같은 표적을 보아도 사람마다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봄.

예수님의 표적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맞춰있었다. 하나님의 뜻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표적: 무가치를 가치로, 십자가 보혈을 통한 회복과 변화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단순히 잔치의 분위기를 위해서만이 아니다.

38년된 병자를 고치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을 했다고 정죄한다.

안식일의 히브리어는 샤바트인데, 완전한 충족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인간의 범죄로 하나님께서 한 번 더 일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예수께서 이 땅에 내려와 일하셨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함을 분명히 지적하시고, 율법의 형식보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더 중요함을 선포하신다. 율법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품고 따르는 것.

율법은 그 자체로 구원을 얻는 수단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내면과 본질이다.

예수께서 참 빛으로 이 땅에 오셨다.

나는 진정 진리의 말씀 안에 거하는가?

2020.03.13(금) 온라인 새벽예배
말씀: 요한복음 7:25~36절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예루살렘에서 말씀을 전하신다.

38년된 병자를 고치시고 안식일에 일을 했다는 이유로 바리새인의 공격을 받으셨다.

바리새인들은 고침받은 병자에 대한 마음은 없고 어떻게든 예수님을 공격할 궁리만 했다.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며 그 사람의 이면을 보지 못하고 공격할 때가 많다. 이면을 보면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는 어디서 오지 모르는데, 예수는 나사렛에서 왔음을 알기에 그리스도가 아니라 수군거린다.

그러나 미가서에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오실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민족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미가서 5:2

성경을 읽을 때는 성경이 정확하게 지시하는 것을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임의대로 읽고 문자 하나에 집착하면  미혹에 빠지게 된다.

29절: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음 바 되었다. 예수님의 선재성(pre-existence)

30절: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 하나님의 타이밍, 카이로스. 요한은 십자가의 때를 강조한다.

31절: 무리는 언약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표적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보고 있었다. 표적을 따라 믿으면 자신의 욕구가 채워질 때 예수를 떠날 수 있다.
우리는 약속을 믿는다.

34절: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다. 우리의 공로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다만 ‘영접’할 뿐이다.

바리새인은 율법으로 그들이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속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거하고 있다.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더욱 확장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0.03.14(토) 온라인 새벽예배
말씀: 요한복음 7장 34~44절

본문은 성령에 대한 예표를 담고 있다.

초막절: 광야 생활 중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절기.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동안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만나를 공급하시고, 밤낮으로 지켜주셨지만 그들은 원망할 뿐 찬양으로 이어졌다는 기록은 없다.

-마라의 쓴 물: 광야 생활 중 샘의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었는데 모세가 말씀에 따라 나뭇가지를 물에 넣었는데 물이 달아졌다.

인생은 고달픈 광야 생활이지만 십자가의 은혜로 인생은 의미있어진다.

-리비딤 사건: 아말렉과의 전투 전, 이스라엘 백성이 목이 마르다 원망했을 때, 모세가 반석을 쳐서 생수가 흘러넘침.

예수님 자신이 반석이셨다. 자신이 깨어짐으로 우리에게 생명의 물을 공급하셨다.

나는 무엇으로 만족하는가?
나는 무엇으로 삶의 동력을 얻는가?

끊임없이 아말렉이 공격하는 우리의 삶 속에 십자가의 공로가 있다.

예수님의 생수의 강이 성령이 오심으로 이제 우리 안에 영원히 내재한다.

십자가 이후의 은총은 성령이 영원히 내재한다는 것. 성령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의 갈급함을 해소한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말씀을 깨닫는다.

인생 광야는 목마르다. 세상의 힘으로 갈증을 해소할 수 없다. 예수만이 생명의 원천이 되신다.

우리는 표적이 아닌 성령으로 믿는다. 성령이 오신 증거는 다양한 기적이 아닌 내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다는 것.

44절: 아직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그들이 예수님을 잡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타이밍, 카이로스는 십자가.

성령은 끊임없이 내 마음 속에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도록 역사하신다.

내가 진리의 말씀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나를 통해 가정과 이웃에게 진리의 빛이 전해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0.03.16(월) 온라인 새벽예배
말씀: 요한복음 7장 45~53절

본문에는 진리를 아는 자와 진리를 모르는 자의 극명한 대비가 나타난다.
많이 배웠다고 해서 진리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으로 곤궁한 처지에 있어도 진리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성령이 도우시면 곤궁한 사람이라도 진리를 알 수 있다. 성령이 도우시지 않으면 학식이 높아도 진리를 알 수 없다.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이어령-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인인 이어령 교수는 성경을 많이 읽었지만 인문학으로만 접근하고 믿지는 못 했다. 이후 딸을 통해 믿음을 갖고 이전에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고백한다.

45~46: 하속들의 책무는 예수를 잡아서 바리새인들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의 마음 속에 진리의 말씀이 울렸다. 그들은 예수를 잡지 못했다.

50~51: 니고데모가 바리새인들로부터 예수를 변론한다. 거듭나야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았던 것이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단은 자신이 믿는 것을 감춘다. 비진리는 어둠 속에서 움직인다.

나는 세상 속에서 내가 믿는 것을 떳떳이 드러내는가? 삶 속에서 진리의 빛이 나타나야 한다. 나를 통해서 가정에서, 세상에서 거룩한 영향력이 파급되어야 한다.


2020.03.17(화) 온라인 새벽예배
말씀: 요한복음 8장 1~11절

우리는 죄인이지만,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능력이 있다.

우리는 어둠 속에 있었다.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은 어둠에 속했다. 그러나 빛이 임하면 어둠은 사라진다. 십자가 은혜가 비춰지면 우리는 진리를 볼 수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예수께서 그 삯을 청산하셨다.
구속(코페르): 죄의 삯을 청산하여 자유를 얻게 함.

율법: 구원 얻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
율법이 강했던 이유는 많은 백성이 군집하여 생활했기 때문이다.

6절: 사람들의 시험=> 만약 예수께서 율법에 따라 “돌로 치라”하시면 예수는 율법 아래에 존재하게 되고, 용서를 말하면 율법을 폐하게 된다.

9절: 무뎌진 그들의 양심에 빛이 비춰진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실낱같은 빛을 보게 된다. 양심의 가책에도 은혜가 필요하다.

마귀는 우리가 죄인이라고 끊임없이 참소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는 자유를 얻었다.

이는 우리가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탄의 고발로부터 자유하다는 의미다.

과거의 죄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장 1절-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에 관심이 없다.
오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과거는 지나갔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오늘 어떻게 살 것인가?

2020.03.18(수) 온라인 새벽예배
말씀: 요한복음 8장 12~20절

예수께서 빛으로 이 땅에 오셨다.

죄가 우리의 눈과 영혼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참 빛으로 우리를 비추셨다.

빛이 임할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은 은혜다. 죄인은 찔림도 느끼지 못 한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빛과 어둠을 대비한다. 빛에 속한 자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반면, 어둠에 속한 자는 예수의 말씀을 모함하기 바쁘다.

빛을 경험한 사람만이 예수를 따를 수 있다. 말씀을 깨닫고 순종하는 자만 예수를 따를 수 있다. 빛이 비춰져야 빛 되신 예수를 따를 수 있다. 계명을 듣고 지키는 자가 예수를 따르는 제자이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21

예수님은 임의대로 말씀을 전하시 않으시고 오직 성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말씀을 전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다. 

15절: 바리새인은 외형을 보고 판단한다. 그들은 병이 있는 자를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 자, 죄를 저지른 자로 판단하였다. 그들이 보기에 열악한 것은 죄의 결과였다.

세상은 외형을 본다. “그 사람이 부유한가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외형이 아니라 영혼을 보신다. “그 영혼이 하나님 없이는 안 되는 영혼인가”

예수께서는 병들고, 지치고, 곤고할 때 하나님 없이는 안 되는 내면을 보신다.

17절: 율법이 정한 최소한의 증인은 두 사람이다. 

예수님이 전하는 증언은 예수님과 하나님이 증인이시기 때문에 진리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만 듣는다.

겸비하여 듣는 마음이 참 복 되다. 

이단의 말에 미혹되는 사람들을 보면 불쌍하다는 마음이 느껴진다.

그들을 보고 왜 저런 미혹에 빠질까 우스워하기보다 과연 나는 진리의 말씀에 순복하는가를 성찰해야만 한다. 

말씀이 들려오는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이 듣게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듣는 마음은 철저한 은혜다. 

나는 지금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가?

오늘도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십자가 앞에 더 나아가는 하루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0.03.19(목) 온라인 새벽예배
말씀: 요한복음 8장 21~30절

*21~22절: “내가 가는 곳”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내가 가는 곳”을 말하실 때, 죽어서 가는 천당으로만 이해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하시는 “그 곳”은 천당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거하실 때도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모든 현장을 가리킨다.

믿음이란 ‘아직’ 가지 않은 천당에 들어간다는 확신만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이뤄지는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천당은 거리가 먼 개념이다.

우리는 아직 천당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미 하나님 나라에 속한다.

23절: 거듭납이란 위로부터 나는 것이다. 거듭난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그분의 통치 안에서 살아간다.

광야에서는 매일 텐트를 치고 거둔다. 광야는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언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나?”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홍해를 건너는 순간,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지 않으면 광야에서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광야에는 진정한 텐트, 성막이 있었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왜 초라한 광야에 성막이 있었을까? 초라할지라도 우리가 있는 현장이 성전임을 예표한다. 

성령의 내재하심으로 우리 자신을 거룩한 성전으로 삼으셨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예배당이 폐쇄된 현실... “공동체 예배가 그립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가 있는 곳이 성전임을 기억해야 한다. 

두 발은 이 땅에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는 신비로운 삶, 크리스천의 삶.

25절: 예수님은 언약을 성취하시는 분. I will that I will. (창세기 15장 참조)

27절: 유대인들은 율법만을 말한다. 율법은 구원 얻은 자의 삶의 양식이지, 구원을 얻는 수단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을 생각하지 않고, 율법의 행위만을 추구했다. 

이단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자신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할 때가 있다. 끊임없이 말씀 앞에 점검해야 한다. 

28절: 십자가를 가리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었던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 -요 3:14-

29절: 우리는 “하나님, 저와 함께 해주세요”라고 너무 애원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 결과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 원인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없는 상황이 온다. 

성숙한 자는 “오늘도 제가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한다.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정죄하고 비난하기 바빴다.

오늘 하루 순종의 삶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확장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2020.03.20(금) 온라인 새벽예배
말씀: 요한복음 8장 31~36절

본문에는 진리와 자유의 함수관계가 나타난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자유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노예에 불과했다. 자신이 율법에 묶여있기에 진정한 자유를 몰랐다. 자신이 속박되어있는 만큼 다른 사람을 속박하고자 했다.

진정한 자유자는 자유를 아는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자 한다.

과거에 있었던 노예제도도 무섭지만 정말 끔찍한 것은 죄의 노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과 같은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다.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시편 8:5~6-

5절에 있는 ‘천사’의 원어는 엘로힘.
따라서 인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다고 번역되어야 함.

인간의 진정한 인간다움은 하나님의 주권을 자유롭게 인정함에 있다.

하나님을 능가하고자 하는 욕막이 인간을 몰락하게 하고, 타락시켰다. 결국 인간은 죄와 사망의 노예로 전락했다.

창3:15, 21: 초기 언약. 여자의 후손으로 자유를 주고 가죽옷을 입힘으로 인간의 죄를 철저히 덮겠다는 피로 맺은 언약.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구속을 위해서는 생명을 내놓는 대가지불이 필요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그들의 입술에는 원망, 불평이 가득했다.

억압하는 대상에는 순복하고 친절하게 자유를 베푸는 대상에는 불평하는 마음은 노예근성이다. 

광야 40년의 방황은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노예근성을 거둬내기 위한 여정.  2세대에는 원망과 불순종이 사라졌다.

자유는 감격과 감동으로 이끄는 원동력이다. 은혜를 아는 자는 자유를 주께 위탁하고 철저히 순종하는 삶을 산다.

율법주의: 은혜와 사랑이 없다. 오직 굴레와 속박, 억압만이 있다.

감격과 감동으로 율법은 쉬운 것이 된다.

31: 예수께서 말씀을 전하시는 대상은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

제자는 사랑과 은혜를 아는 자이다. 성숙한 자는 사랑을 이용하고 유린하지 않고, 가슴이 저미는 감격으로 대한다.

자유와 감격으로 순종하는 자가 제자이다. 

오늘도 십자가 공로로 주어진 자유에 감사하며, 감격과 감동으로 순종의 삶을 올려드리길 간절히 바랍니다.

2020.03.21(토) 온라인 새벽예배
말씀: 요한복음 8장 37~47절

예수님과 대화하는 상대는 누구인가?

예수님 앞에 있는 수많은 군중 중 믿는 자도 있었다.

또다른 청중은 예수님과 쟁론하는 바리새인이다. 그들은 율법의 제자가 아닌 마귀의 제자이다. 왜냐하면 진리의 말씀을 전혀 듣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께 속한 자는 진리를 알고 믿는다. 진리가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이런 자유함 속에 감격하는 자가 제자이다.

바리새인에게는 자유도 감격도 없었다. 그들은 율법의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성토했다.

진리를 믿는 자는 그 안에 성령이 내재하신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자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성부 하나님이시다.
바리새인의 아비는 마귀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유와 감동으로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에게 순종은 너무 무겁다. 따라서 그들은 이런 무거움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고, 비난, 정죄, 분노했다. 이는 마귀의 역사다. 마귀는 끊임없이 참소한다.

카인의 분노와 살인의 배후에는 마귀가 주는 마음이 있었다.

이단에는 자유와 사랑이 없다. 영혼을 향한 억압과 유린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성토와 정죄가 아닌 십자가 공로로 인한 자유와 감격으로 다른 사람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는 역사가 우리 안에 가득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0.03.23(월) 온라인 새벽예배
말씀: 요한복음 8장 48~59절

핵심구절: 58절
예수님의 선재성(pre-existence)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1~3

인류의 창조, 이스라엘의 태동 전부터 예수님께서 계셨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1:1-

48절: 38년된 병자를 고친 이후부터 계속된 갈등. 인간의 범죄 이후, 안식(샤바트)이 깨졌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56: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보길 사모했다.

히브리서 5장, 6장, 7장: 살렘 왕 멜기세덱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군지 모르고, 하나님의 아들과 같다. 예수님에 대한 모형.

창세기 14:19~20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한 전쟁에서 승리 후, 십분의 일을 그에게 바침.

57: 당시 예수님의 나이는 삼십대 초반이었다. 그런 예수님을 유대인은 맞는 나이보다 20살 높게 보았다.

당시 예수님의 삶이 곤고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영광을 버리고  우리의 삶처럼 이 땅에서 철이 들자마자 목수 일을 하며 노동하셨다.

그분의 외형은 곤고했지만, 그분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셨다.

예수의 십자가 부활을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다. 우리의 힘으로 믿을 수 없다. 성령이 이 놀라운 사실을 믿게 하셨다.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라 믿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다.

매일마다 살아가지만 매일마다 죽음을 향해 한걸음 나아간다.

영생이 우리에게 진정한 소망이다.

오늘도 은혜 안에서 세상과 연합하지 않고 십자가를 붙들며 견고해지는 삶을 살아내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0.03.24(화) 온라인 새벽예배
말씀: 요한복음 9장 1~12절

2절: 맹인을 향한 제자들의 언어폭력. 질병을 죄의 결과로 여기는 그들의 단선적인 가치관을 알 수 있다.

5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1장 4절과 연결된다.

6~7절: 어둠이 가득한 맹인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예수님의 행동은 그에게 수치일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한다. 주님의 말씀에 순복한다. 
예수살렘에서 실로암 못까지는 경사가 심한 언덕길이다. 그가 그길을 직접 걸어가서 씻는다.

*실로암 못
실로암 못의 근원은 기혼 샘이다. 기혼 샘은 지하수가 풍부히 흘러나오던 아주 중요한 샘이었다.
기혼 샘은 솔로몬이 아도니야를 제치고 기름 부음을 받았던 장소이다(열왕기상 1장).
실로암 못의 기원: 앗시리아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했을 때, 히스기야가 터널을 파서 기혼 샘의 물줄기를 성전으로 끌어들였다(역대하 30장). 이것이 실로암 못의 기원이다.

히스기야는 앗시리아와의 전쟁, 죽을 병이라는 국가의 위기와 개인의 위기를 경험한다(이사야36~38).

앞을 보지 못하는 어둠의 시간 속에서 히스기야는 간절히 기도한다.

예배당이 막힐 정도로 중대한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히스기야처럼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단단한 바위를 뚫어 성전에 물이 들어오게 하듯이, 바위보다 더 단단하고 완악한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주님의 말씀이 들려와야 한다. 그래야만 살 수 있다.

혼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말씀이 우리의 가슴을 관통해야만 힘을 얻는다.

어둠의 때, 말씀을 통해 빛을 보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 유일한 해법은 가슴을 관통하는 말씀이 임하는 것이다. 

무릎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듣는 자는 살 것이다.

질병의 아픔, 경제적 위기 그 어느 때보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 앞을 볼 수 없는 절망 가운데 무릎으로 나아가야 한다.

오늘도 들려오는 말씀을 통해 빛을 보는 소중한 회복의 역사가 가득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0.03.25(수) 온라인 새벽예배
말씀: 요한복음 9장 13~23절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향한 바리새인의 공격과 갈등이 여전히 나타난다. 그들이 어둠에 속해 깨닫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많은 이적을 행하신 이유는 구약의 모든 말씀을 성취하는 메시야임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단순한 이적이 아닌 표적이다.

맹인에게 들려온 주님의 음성 “이 사람이나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사람들에게 배려받지 못하고 비난과 죄의식 속에서 살던 그에게 말씀의 빛이 비춰졌다. 빛이 그의 가슴을 관통하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을 거부했을 것이다.

14절: 그날도 공교롭게도 안식일이었다. 왜 예수께서 갈등이 됨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셨을까?

그분이 진정한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이 범죄한 이후, 안식이 깨졌는데, 예수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충족(샤바트)을 주신다. 또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임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막막하고 어두운 인생 광야에서 예수께서 우리의 빛이 되신다.

인생에 밤이 찾아올 때, 말씀이 가슴을 관통해야 산다. 히스기야 터널을 뚫어 실로암 못이 흘러 살게 된 이스라엘 민족처럼.

17절: 조금 아쉬운 그의 고백. 그러나 이 당시엔 그의 최선이었다. 이후,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깨닫는다.

비진리가 난무하는 세상. 그들은 이단이기에 우리는 상관 없다는 방관자의 태도보다는 진리의 말씀을 단단히 붙잡지 못하고 세상을 빛으로 비추지는 못했는지 돌아보는 겸비함이 필요하다.

38년된 병자에게, 맹인에게 안식일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저 어둠 속에 지나가는 하루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날 예수님을 만나 완전한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다. 

오늘도 진리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확증하는 하루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건강 가운데, 생업 가운데 비관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회복의 역사가 있길 함께 기도합시다.

2020.03.26(목) 온라인 새벽예배
말씀: 요한복음 9장 24~41절

본문에는 전에 소경이었던 자를 향한 바리새인의 추궁이 나타난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연약한 모습은 죄의 결과로 치부했고 자신의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사람들에게 강요했다. 비진리로 사람들을 미혹한 것이다.

24: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하나님을 분리하려고 시도한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25~27: 바리새인의 압박에 맹인이었던 자가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그는 분명히 자신이 보지 못했다가 보게 되었다고 증거한다.

28: 맹인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자 바리새인들은 맹인과 예수님을 한 패로 엮어 정죄하고 있다. 예수님을 철저히 거부하는 모습이다.

30~33: 맹인이었던 자의 신앙 고백. 그는 예수께서 분명히 자신의 눈을 뜨게 하셨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바리새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지신의 경험을 바리새인의 추궁과 타협하지 않는다. 다른 바리새인과 달리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인정한 니고데모가 떠오른다.

34: 그들의 오만함과 고집이 나타난다. 바리새인의 단선적인 가치관에 따르면 맹인이었던 자가 보게 되었으니 지금은 그에게 죄가 없는 것인데 죄가 있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한 그를 예수께서 만나 주신다.

35~37: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가 떠오른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요4:25~26

에고 에이미: I am that I am.  항상 현재이시고 자기 자신이신 분.

이사야서에 소경이 눈을 뜨게 된다는 메시야에 대한 언약. 소경이 기다리던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었다.

39: 보지 못하는 자는 보고=> 하나님 없이는 안 되는 자,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자는 진리의 빛을 볼 것이다.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함=> 자기 의로 구원을 얻었다고 여기는 자는 영적 맹인이다. 

40: 바리새인들은 영적인 말씀을 육적인 관점으로 접근해 “우리는 보는데 왜 맹인인가?”하고 반문한다. 가슴을 치는 아픔이 있어야 하는데 여전히 완악한 그들의 마음이 말씀으로 뚫리지 않았다. 아직도 영적 어둠에 거하고 있다.

41: “눈으로는 보지만 영적 맹인이었구나”하고 깨달았어야 한다. 그러나 자기 의, 율법으로 가득하면 여전히 죄인이다.

우리는 이전에 영적 맹인이었다. 이제는 주님을 믿고 빛을 보게 되었다.

오늘도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내게 비춰진 진리를 붙잡고 굳세게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0.03.27(금) 온라인 새벽예배
말씀: 요한복음 10장 1~10절

목자는 들짐승으로부터 양을 지키기 위해 우리를 만들어 문 앞을 지킨다.

양은 우리 안에 있을 때 안전하다.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할 때 안전하다.

1절: 목자는 담을 넘어가지 않는다. 훔치려는 자는 담을 넘어간다.

2절: 목자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우리 안에 들어간다.

양의 문: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수님의 면모. 일관성, 진실성, 정직성

세상은 빛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정체가 탄로되기 때문이다.

양의 우리 안에 있는가?
우리 바깥으로 넘어가려 하는가?

바리새인은 주님의 음성을 못 듣는다.
그러나 맹인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주님의 양이면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말씀을 통해 힘을 얻고 매번 살아갈 동력을 얻는다.

예수께서 자유함을 주시기 원하신다.
2020.03.28(토) 온라인 새벽예배
말씀: 요한복음 10장 11~21절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심으로 유대인들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예수께서 양의 문이 되신다. 예수를 통해서만 생명을 얻는다.
문을 통하지 않고 담을 넘는 자는 강도다.

선한 목자는 책임을 다하는 목자다.

다윗이 목동일 때,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양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로 싸웠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생명을 바친다. 잠깐 양을 맡은 자는 자기 생명을 위해 양을 버린다. 평소에는 차이를 느끼지 못하지만 위기의 순간에 차이가 드러난다.

책임감의 차이다.

선한 목자는 양을 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완벽하게 안다. 전인격적으로 안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목자가 생명을 버려야 우리가 산다.

예수님이 사탄의 권세에 의해 생명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스스로 샐명을 내놓는 것이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양을 광야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목자의 음성을 따라 살 때 살아남을 수 있다.

험난한 광야에서 환경이 아닌 주님의 음성을 따라 살길, 위기와 두려움 속에서 말씀에 인생의 방향을 잡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다음 세대에게 카톡으로 말씀을 나누기

온라인 예배에 익숙해지지 않고 예배에 대한 감격과 사모함이 넘쳐나길, 질병으로 고통받는 동역자분들에게 회복의 역사가 있길, 월요일에 정밀 검사를 받으시는 목사님을 위해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2020.03.30(월) 온라인 새벽예배
말씀: 요한복음 10장 22~29절수전절: 성전을 수리하는 기간

BC 140년 수리아에 의해 이스라엘이 억압받았다. 그때 마카비가 “우리에게 신앙을, 아니면 죽음을”이란 구호로 혁명을 일으켰다. 

수전절은 수리아가 돼지 피로 더럽힌 성전을 촛불로 환하게 밝혀 빛의 절기, 하누카로 불리기도 한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세상의 빛으로 설명해 수전절과 연결시킨다. 수전절에 더러워진 것을 정결하게 하듯이, 예수께서는 죄와 어둠을 정복하신다.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일을 뒤에서 서술하지만, 요한복음은 예수님과 수전절을 연결시키기 위해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일을 상대적으로 앞에 서술한다.

22절: 당시 성전은 헤롯 분봉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회유하기 위해 재건한 성전이다. 진정한 성전이 아님에도 헤롯을 추종하는 헤롯당 사람들은 이 성전에 거하기를 좋아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양이 아닌, 권력의 충견이었다.

24~25: 이미 예수께서 많은 표적을 보이시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29: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서 산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보호로부터 공격할 수 없다. 육체적 한계가 있지만 우리는 영원히 산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영원히 사는 그날을 기다린다. 언젠간 주님의 얼굴을 보는 그날이 온다.

날 부르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 어둠을 환하게 비추는 빛 가운데 거하는 하루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0.03.31(화) 온라인 새벽예배
말씀: 요한복음 10장 30~42절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예수님과 하나님의 동질성.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신성이 담겨있다.

*삼위일체: 세 인격이지만 영광은 하나다.

성부 하나님: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구원의 마스터플랜을 갖고 계시다.

성자 하나님: 성부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해 부활하시고 재림하실 분. 예수님이 드러내신 권능은 자신의 힘이 아닌 성부 하나님의 뜻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성령 하나님: 성부와 성자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내 안에 내재하시는 분.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하게 하시는 분.

32~33: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인데 그들은 그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34: “너희는 신들이며 지존자의 아들들이다” -시편 82편 6절-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35: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는 그렇다.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우리가 찾아가서 믿은 것이 아니라 성령이 찾아와주셔서 믿게 된 것이다.

겉 사람은 후패하고 유한한 삶을 살지만 언약대로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히 산다.

37: 요한복음이 많은 표적을 소개하는 이유는 단순히 기적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서.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권능, 신실하심이 있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힘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드러낸 것이었다.

41: 세례 요한은 표적을 드러내지 않고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다.

우리는 표적을 보지 않고 성령을 통해서 믿는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재하심이 가장 놀라운 표적이다.

오늘도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과 역사를 볼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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