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도 진액을 쏟으시는 목사님때문에...

작성자
조정희
작성일
2022-05-10 20:52
조회
961
목사인 제가  기도하면 되니까 일주일에 두번정도는 
여러분은(순장님들에게 당부하심)  알람꺼놓고 푹 주무세요 ^^
(진심인듯 아닌듯  ?? 정말 자도 되는건가 ? 했지만  진심이셨음ㅜㅜ  )
한 영혼을 책임진 순장이 기도안하면 안 된다고 강조하시면서도
건강을 위해서라도 일주일에 두번정도는 깊은 잠을 청하라고
우리의 건강까지도 챙겨주셨던 ....
ㅡ원로목사님께서 진심으로 우리의 건강을 걱정하셔서 하시던 말씀이었죠ㅡ
지나고 보니
우리가 목사님의 건강을 위해서 그렇게 억지로라도
일주일에 두번은 푹 잠을 주무시게 했어야하는데 하는
회한이 몰려옵니다 ㅠㅜㅜ

그래서 일주일에 두번정도는  깊은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우리 박요한목사님께서 새벽말씀도 주일말씀처럼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준비해오시는지 단 한 말씀도 놓쳐선 안될것 같은
주옥같은 말씀들로 선포해주셔서  모두들 목사님의 건강을 걱정하기에 이를정도입니다
너무나 힘든 상황인것 우리가 다 아는데
너무나 진액을 쏟으시는 모습들이 역력하기에....
새벽은 좀 살살 ~ 하셔도 되련만은  감사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 가득함으로
새벽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서 참으로 귀하게 받으시고 기억해주셔서
우리의 아픔을 어서속히 치유해주시기를 기도하는 새벽입니다.
혹시 놓친 분들을 위해서 주옥같은 새벽의 은혜를 나눠봅니다.



ㅡ오늘 새벽에 주신 말씀 묵상하기 ㅡ
*말씀으로 시험을 이기시다 (마태복음4장 1ㅡ11)
사단의 시험이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기에 우리를 어찌하지 못한다.
고난의 핵심은 성도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이 가능케하는것이다.

우리가 성령님의 이끌림을 당하고 살면 반드시 시험으로 부터 승리할 수 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적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될 수 있다
경제적인 부와 명예,건강,은혜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될 수 있기에..

믿음이 크면 클수록 사탄의 시험도 커진다.순장사역을 하고 에셀사역을 하는 동역자들 
맡겨진 영혼이 많을수록  사명의 크기만큼
시험의 크기도 비례하게 한다.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비판을 통해 실족하게 만든다.
수많은 영혼들 예수님의 가치인 여러분들을 비하하고 비천하게 만든다
모세가 위대한 지도자였음에도  
얼마나 많은 불평과 비평을 받았는지 모른다

사명이 크기에 사탄이 집요하게 공격한다.
기도해도 탈출구가 없을때 기도하며 기다리라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라
막다른 벽에 다다를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
성령님의 절대주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만든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성령님의 이끌림을 받는 삶이 되도록
하나님의 목소리에 집중하라

언제나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삶으로

그 약속을 잊지 않는 삶으로
사단의 시험가운데  날마다 말씀으로 승리하게 하셔서
우리 원로목사님이 그렇게도 소망함으로 일평생 기도했던
우리들의 상처가 별이 되게하옵소서






주 사랑으로 오셨네 (요한일서 1:1ㅡ4)

미국의 오바마 전대통령이 미국 내 무슬림과 무신론자들을

위해 “Merry Christmas”를 “Happy Holiday”라 말한

뒤로부터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메리 크리스마스가 아닌

해피 홀리데이라고 인사를 나눕니다.

이처럼 세속화 된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탄생의 의미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내에서는 이러한 세속화 그리고 교회의 세속화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속도시>하버드 대학교 종교학 교수 하비 콕스 (신의 역사적 개입)하지만 그는 “세속화는 반종교적인 운동이 아니라 인간의 성숙 과정이자 신의 선물이다”고 주장합니다.

한편으론 저는 이러한 세속적인 시대적 분위기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더욱 정확히 이해하는데 필요한 ‘중요성’과 ‘긴급성’을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스마스는 처녀인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성령으로 인해 성자 예수님께서 아기로 태어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를 신학적인 용어로 ‘성육신(Incarnation) 교리’라고 말합니다.

교리(Doctrine)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그 기초가 되는 ‘믿음의 구체적인 내용’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교리는 우리의 신앙의 기초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완전히 믿고 헌신할 수 있도록 하는 신앙의 본질적인 주요원리 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리입니다.

사실 고대시대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은 기존 종교의 신관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육신 사건은 다른 종교들과 비교할 때 기독교의 가장 큰 차별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입는다는 사실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성육신 사건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똑같이 이 땅에 오셔서 일평생 인간으로 사셨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성육신 사건은 우리의 믿음의 교리일 뿐만이 아니라 이것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실제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1-2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여기서 “말씀”: Logos,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자신이 ‘증언자’이자 ‘증거자’라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제자였습니다.

아니 다른 제자들 중 예수님을 독점해서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싶은 욕심이

가장 큰 제자가 바로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은 실제로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모든 것을 가까이에서 지켜 본 역사적 실존 인물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아주 단호하게 말합니다.

“내가 직접 들었고 내가 보았고 내가 만졌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영광스런 하나님을 피조물인 인간은 볼 수 없다.

성경은 인간으로서 유일하게 친구와 이야기 하듯 ‘하나님과 대면한 자’가 모세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세도 하나님과 친구를 대하듯 하나님과 교제했지만 그조차 하나님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출33:18, 20-23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모세가 영광스런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을 수 밖에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손으로 그를 덮으셨다.

 

그래서 모세조차도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영광스런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신성을 보기 위해선 어떤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찰스 웨슬리가 지은 찬송가, ‘천사 찬송하기를’ (Hark the harald angels sing)

2절: Veiled in flesh, 육체에 쌓이다(wrapped) the Godhead see; Hail the incarnate Deity.”(성육신

하신 하나님)

“신성이 육체에 의해 가린 바 된 하나님을 보라, 사람으로 태어나신 하나님 만세”

하나님의 신성이 육체에 의해 가린 바 되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것을 압도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보는 것은 인간 자신을 파괴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의 육체가 하나님의 신성을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감싸야만 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육체가 우리가 하나님을 안전하게 볼 수 있는 ‘필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디어 영광스런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어떠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크리스마스는 영광스런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와 가까워지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신 이 사건은 영광스런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친히 거하시

며 우리와 사랑과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되셨고 우리와 친밀한 사귐을 가지는 존재가 되셨다는 것

을 의미한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나도 크고 압도하기에

결코 인간이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도, 볼 수도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은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심으로 인하여

“1)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었고 2)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볼 수 있게 되었으며

3)하나님의 겸손을 볼 수 있게 되었고 또한 4)하나님의 긍휼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마치 우리가 서로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서로 친밀히 알아 가듯이

우리도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며 그래서 더욱 주님을 친밀히 알아가며

하나님의 영광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심지어 그분의 영광을 보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단지 어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이것은 Real, ‘실제’ 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있고 친밀히 교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더욱 친밀하게 느낍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창조자인 자신을 인격적으로 친밀히 알게끔 하시기 위해서 이토록 애를 쓰셨을까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을 떠올립니다.

왜 사람들은 크리스마스가 되면, 유독 ‘사랑’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요?

저는 그 이유가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1)이성적으로 2)과학적으로 설명하기를 원한다.

사실 물리학에 따르면 모든 것은 ‘물질’일 뿐이다.

“심지어 저와 여러분도 단지 물질일 뿐 그 이상의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영혼 우리의 정신조차 단지 물질일 뿐이다.”

영국의 생물학자인 프랜시스 크릭(Francis Harry Compton Crick)이 유전자의 DNA 코드를 해독하여

노벨상을 수상하였습니다 (1962). 노벨상을 수상할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당신의 기쁨, 슬픔, 기억, 야망, 정체성, 자유의지, 사랑은 거대한 신경세포 집합체의 행동에

불과하다.”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에 빠지는 현상’은 단지 인간의 뇌속에서 벌어지는 ‘화학적 반응’일 뿐이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이 단지 ‘화학적 반응’일 뿐이라는 것은

“인간은 단지 본능적으로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사랑하고 자식을 생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몇 해 전 한 신문기사에서 한 70대 노모가 암으로 투병하다가 3남 1녀 자식들에게 남긴 유서2

"자네들이 내 자식이었음이 고마웠다. 자네들이 나를 돌보아줌이 고마웠네

자네들이 세상에 태어나 나를 '어미'라 불러주고 젖 물려 배부르면 나를 바라본 눈길에

참 행복했다네... 병들어 하나님 부르실 때 곱게 갈 수 있게 곁에 있어줘서 참말로 고맙네.

지아비 잃어 세상 무너져 험한 세상 속을 버틸 수 있게 해줌도 자네들이었네.

자네들이 있어서 잘 살았고 자네들이 있어서 열심히 살았네.

딸 아이야, 맏며느리, 맏딸 노릇 버거웠지? 큰 애야 맏이노릇 하느라 힘들었지?

둘째야 일찍 어미곁 떠나 홀로 서느라 힘들었지? 막내야, 어미 젖이 시원치 않음에도

공부하느라 힘들었지? 고맙다. 사랑한다. 그리고 다음에 만나자. 엄마가“

 

여러분 만일 프랜시스 크릭의 주장이 옳다면,

사랑은 단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 뇌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작용일 뿐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사랑이 가장 소중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랑하기에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연인 그리고 부부

심지어 자신의 목숨조차 아끼지 않고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를 볼 때

우리는 그 무엇보다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사도 요한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요일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여러분 성경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것이 성경의 대답입니다.

이미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셨고,

동등한 영광을 누리시며 서로 완벽한 사랑으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존재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 그 자체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 사랑이 이 세상을 그리고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이셨기에, 우리를 위해 친히 피조물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고,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피조물인 우리는 왜 사랑을 하는 것일까요?

C.S. 루이스는 그의 책 <예기치 못한 기쁨>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 계신다면 창조물인 우리는 분명 창조주인 그분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글을 쓰는 작가는(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반드시 창조물인 등장인물에게 자신을 투사합니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창조했다면 셰익스피어는 자신이 만든 창조물인 햄릿에게 자기 자신을 투사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창조물인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투사하셨습니다.

C.S. 루이스는 말합니다. “아,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그분을 선하게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님께서 친히, 사랑으로 이 땅에 오신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크리스마스는 “사랑이 우리의 뇌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물리적이고, 화학적 반응이 아닌,

사랑은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존재했고, 바로, 그 사랑이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했으며,

그리고 그 사랑이 이 세상을 구원했다”라고 증거합니다.

여러분 크리스마스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있고,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 사랑으로 지음받은 우리 역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설사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실패하고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을 실패 할지라도

날마다 우리 안에 거하시고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의지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그리고 서로를 끝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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