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너, 네가 만든 나

일반
작성자
윤휘종
작성일
2020-11-03 07:53
조회
667


"'나' 자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다만 근원어 '나-너'이거나 근원어 '나-그것'의 '나'일 뿐이다." -마르틴 부버-

부버가 말하는 근원어(Grundwort)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란 관계 속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한듯하다.

그렇다. 나 자신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곧 내가 맺는 관계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맺어온 관계의 산물이자 총체성이다. 그러므로 '나'를 바꾸기 위해서는 관계를 바꿔야 한다. 왜냐하면 관계가 나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만약 복제기술이 발전하여 히틀러의 DNA를 통해 히틀러를 복제한다면, 히틀러와 똑같은 사람이 복제될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복제된 인간이 만나는 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관계를 맺는다. 부모와 관계를 맺고, 누군가는 형제 자매와 관계를 맺는다. 입학하면 친구와 관계를 맺고 선생님과 관계를 맺는다. 남학생들은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의 세계를 경험한다. 그 세계 속에서 힘이 없는 자는 유머감각을 기르거나 공부에 매진해 자기만의 생존전략을 익힌다. 그렇게 수 많은 관계를 통해 오늘날의 '나'가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자녀가 다니는 학원을 학익동에서 대치동으로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좋은 관계를 형성해주는 것이다.

누군가는 우연히 만난 관계를 통해 운명이 바뀐다.

관계 중에 가장 중요한 관계는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은혜를 입은 자만이, 자기 자신과의 만남 속에서 자기를 사랑할 수 있고, 나아가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다.

불과 얼마 전, 우상숭배자들을 심판했던 엘리야가 광야에서 죽기를 구한다. 엘리야가 위대해 보이지만, 그도 결국 사람이다. 시선을 하나님께 맞추지 못하고, 현실에 맞추는 순간, 그는 고갈됐다. 이는 엘리야만의 문제가 아니다. 외로움이란 나는 타인에게 시선을 두는데, 타인이 나에게 시선을 두지 않을 때 생기는 감정이다. 그렇게 고갈된 영혼은 남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 매력을 상실한다. 고갈된 사람 곁에서 함께 고갈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외로움을 느낄 때, 시선을 타인에서 나로 전환하면, 외로움은 고독으로 바뀐다. 그때 나 자신을 성찰할 수 있게 된다. 여기까지가 인문학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한 걸음 나아가 시선을 하나님께로 맞추면, 비로소 신앙에 이른다.

그러므로 관계의 문제이든 그 어떤 문제이든, 깊은 절망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든 관계를 회복하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은 사람을 다른 말로,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 부른다. 성령이 내 안에 충만할 때, 내 안에 기쁨과 사랑, 감사가 넘치고, 비로소 남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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