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섭리는 어떻게 양립가능할까?

일반
작성자
윤휘종
작성일
2021-01-10 22:13
조회
901
안녕하십니까? 은혜의 교회가 키운 철학자 윤휘종입니다. 평안한 주일 보내셨습니까? 2021년이 벌써 열흘이나 지났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많은 분들이 새해 계획을 세우고, 새해에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살길 다짐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I will that I will'로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이는 '일을 이루고야 마시는 분'이란 뜻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반드시 이루고야 마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필연적'입니다. 올해 동역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속 가운데,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증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자유는 필연성을 거스를 수 있는 힘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가 양립할 수 있는가?"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자유와 섭리의 양립가능성은 '악의 문제'와 더불어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헤겔 철학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섭리'의 양립가능성 문제를 간단하게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위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보통 '자유'를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아마 대부분의 분들이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내 마음대로 행할 수 있음'을 생각하실 겁니다. 이것은 영국 경험론의 '소극적 자유'입니다. 칸트에 따르면, 경험론자들의 '자유'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가 아니라, 경향성입니다. 경향성이란 내가 나의 욕구, 충동에 따라 행동하고, 그에 따라 나의 '쾌락'을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칸트가 경향성을 자유라 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갈증을 느껴서 물을 마시고,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행위는 자유로워 보이지만, 사실 몸에서 보내는 신호에 따라 우리가 행동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몸에서 보내는 신호를 우리가 자발적으로 일으키지 않습니다.


칸트의 자유 개념은 '자율'입니다.  자율이란 독일어로 'Autonomie'입니다. 이는 스스로, 자발적을 뜻하는 'Auto'와 법칙을 뜻하는 헬라어 'nomos'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법칙을 부과한다는 의미입니다. '자기 맘대로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게 법칙을 부과하고 그 법칙을 지키는 것이 자유라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유 학습'이 아닌, '자율 학습'은 적합한 단어입니다. 내 마음대로 이것 저것 아무렇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공부의 법칙을 세우고 그것을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어떤 법칙을 세워야 할까요? 여기서도 자기 임의대로 아무 법칙이나 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 법칙이 '보편화 가능'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만이 지킬 수 있는 법이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지킬 수 있는 법인 것이죠. 그러나 칸트는 이러한 자유가 현실세계에서는 실현이 불가능하고 오직 도덕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실세계 속에서 인과법칙에 지배받기 때문이죠.


헤겔은 이러한 자유에 대한 이분법적인 칸트의 주장을 거부합니다. 헤겔은 자유가 도덕세계만이 아니라, 현실세계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고집합니다. 헤겔의 자유 개념은 조금 독특합니다. 헤겔에 따르면, 자유는 '필연성을 의식함'입니다. 우리는 보통 필연성을 거스르는 것을 자유로 생각합니다. '필연성을 의식하는 것이 자유'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필연성이란 맹목적입니다. 예를 들어, 만유인력의 법칙을 인간이 발견하기 전에는 사물이 위에서 떨어지는 이유를 알지 못 했습니다. 그 현상은 인간에게 맹목적인 것이죠. 그러나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달은 인간은 사물이 위에서 떨어지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그러한 현상은 맹목적이지 않고 인간에게 명확합니다. 이렇게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는 것이 자유라고 헤겔은 주장합니다. 그에 따르면, 세계의 이면에는 '절대정신'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 정신은 인류의 자유를 확장해나가며, 발전합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그리스 성인 남성만 자유로웠습니다. 어린아이, 외국인, 여성은 자유롭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점점 발전하면서, 그 자유가 확대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자유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대정신에 합치하는 삶을 사는 자를 헤겔은 자유롭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헤겔의 주장을 신앙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세계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언약, 섭리, 마스터플랜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됩니다. 그리고 필연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의식하고 그에 맞게 행동할 때, 우리의 삶 속에 진정한 자유가 실현됩니다. 성경의 구절에도 이러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베드로전서 2장 16절- 

 

우리가 악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자유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죄의 노예된 삶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노예처럼 억지로 율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섭리, 필연성을 의식하는 행동이고, 순종은 그 필연성에 자신의 의지를 맞추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순종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앞서야 합니다. 기도를 해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게 되고, 우리 삶 속에서 자유가 실현됩니다. 은혜는 역망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말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하나님의 뜻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돌아봤을 때, 우리는 "돌아보니 모두 은혜였다"고 고백합니다. 시간이 흐른 후,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것이죠.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당장 하나님의 뜻을 모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내 삶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맹목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자가 자유인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계시는데, 다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2021년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가며, 자유를 누리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재작년 저녁예배에 있었던 한 동역자의 고백이 위의 내용을 잘 요약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실 때도 있고 신실하지 않으실 때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항상 신실하신데, 내가 다만 기도로써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깨닫지 못할 뿐이었다. 기도로 깨어있을 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깨달을 수 있다."  

 

저는 으로 지식을 습득했을 뿐이지만, 삶 속에서 스스로 지혜를 터득하신 그분에게 존경을 담아 본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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