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부흥사경회 제8과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말씀 요약

일반
작성자
윤휘종
작성일
2020-11-18 15:58
조회
318
2020부흥사경회 11/17(화) 저녁 제8과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다음의 말씀이 주는 교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잊고 산다.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며 산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

앞으로 살 날이 많지 않다. 게다가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용서 안하며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다. 영적으로 긴장해야 한다.

요시야는 누구인가? 당대의 신앙개혁자였다. 할아버지인 므낫세, 아버지인 암몬 모두 악한 왕이었으나, 선대로부터 밝은 길을 인도받지 못 했으나, 어두운 시대의 빛과 같은 사람이었다. 요시야의 시대는 오늘날의 시대와 유사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하다. 이 시대의 요시야로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요시야는 어떻게 어두운 시대 속에서 선하게 살 수 있었는가?

므낫세: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대하33:2)

아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대하33:22)

요시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대하34:2)

악과 정직을 평가하는 기준은 얼마동안 왕위에 있었는가가 아니다. 신앙은 길이보다 깊이다. 사람의 평가는 인기다. 인기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평가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가 하나님의 평가 기준이다. 그가 무엇을 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이다. 그가 선한 사람이기에 선한 행동을 한 것이다.

정직의 모델: 다윗. 다윗의 반대: 사울.

정직의 기준은 윤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윤리적이지 못 했기 때문이다. 정직의 기준은 순종이다. 다윗은 죄를 자백했다.

요시야와 두 선대 왕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우상이다. 므낫세와 아몬은 우상숭배자였다. 그러나 요시야는 예배자였다. 사람은 우상숭배자거나 예배자이다. 둘 중에 하나다. 당신은 우상숭배자인가, 예배자인가? 우상이란 무엇인가? 내가 만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이 아닌 내가 만든 신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다른 신이 아닌 애굽에서 우리는 인도하신 신이라 칭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생각했다. 우상은 곧 내가 만든 하나님이다. 자기가 주인인 것이다. 하나님을 조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내 유익의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하나님을 위한 삶이 아닌, 자기를 위한 삶이 곧 우상숭배이다. 내가 열심히 믿어도 우상숭배자일 수 있다. 바리새인도 열심히 있었으나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섬겼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하나님과 자신이 만든 하나님 사이의 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시야는 우상을 척결한다. 우상을 타파한다. 선한 왕의 공통점은 우상을 척결이다.

직분, 연륜과 상관없다. 우상숭배자라면 악한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를 가장 먼저 책망하신다.

요시야는 성전을 정결하게 했다. 구원 받은 한 사람이 곧 성전이다. 내 마음이 무너졌다면 다시 세워야 한다. 하나님 앞에 죄를 자복, 죄를 회개하여 용서받아야 한다. 내 마음이 죄로 더러워지지는 않았는가 점검해야 한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영적 간음이다.

요시야는 성전을 정결하게 하는 중 율법책을 발견한다. 이것은 요시야 앞의 왕들이 말씀 없이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대 왕들이 망한 이유는 그 속에 말씀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 속에 말씀을 잃어버린 삶이 악한 삶이다.

“왕이 율법의 말씀을 듣자 곧 자기 옷을 찢더라”(대하34:19) 요시야는 말씀 앞에 통곡했다. 말씀에 대한 정직한 반응이다. 지금 내 삶에 말씀이 들려지는가? 말씀 앞에 무릎 꿇고 죄를 자백해야 한다.

“너희는 가서 나와 및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은 자들을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대하34:21) 말씀 앞에 물어야 한다. 말씀 앞에 자신의 삶을 성찰해야 한다.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손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대하34:27)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요시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하나님께서 요시야의 통곡, 회개, 순종에 응답하셨다.

그러므로 내게 네게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➀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내리는 ➁모든 재앙을 네게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대하34:28)

=> 요시야의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두 가지 약속.

요시야의 26세에 주셨던 약속 이후 중간에 다른 이야기 없이 바로 39세가 된 요시야의 죽음으로 성경은 넘어간다. 왜 이렇게 바로 넘어갔을까? 성경은 인간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봐야한다. 인간적인 관점으로 함부로 타인의 인생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너저분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성경이 바로 요시야의 죽음으로 건너 뛴 이유는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셨다는 것을 보기 위함이다. 인간이 보기엔 요시야의 죽음이 허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요시야는 그러한 죽음으로 묘실로 들어가고, 시드기야가 두 눈이 뽑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이루셨다.

우상숭배는 곧 자기가 주인되는 삶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고 싶으셔도 불순종하는 한 축복할 명분이 아무것도 없다. 말씀 앞에 통곡하며 순복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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