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부흥사경회 제7과 <용서와 억울한 일> 말씀 요약

일반
작성자
윤휘종
작성일
2020-11-18 16:28
조회
308
2020부흥사경회 11/18(수) 새벽 제7과 <용서와 억울한 일>

*모든 관계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부모와의 관계는 내 선택이 아니다. 하나님의 허락이다. 그러므로 부모를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와의 관계가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관계도 있다. 그러한 관계를 맺는 것에는 내 책임이 따른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의 말에 영향을 받고 산다. 누구의 말을 듣고 살 것인지를 선택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을 져야 한다. 영적 권위에 속하면 절대 타락하지 않는다. 마치 핵우산 같이 영적으로 나를 지켜준다. 나는 지금 누구의 말을 듣고 살아가는가? 듣는 것을 조심하라. 주일 말씀 한 번으로 충분하다. 그 한 번의 말씀을 한 주간 천 번동안도 묵상할 수 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은 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만나게 된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주님을 보여줄 책임이 있다.

스데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 그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무지해서 그러한 행동을 하는 줄 알기에... 그들이 하다고 생각하면 분노한다. 그러나 그들이 무지하다고 생각하면 긍휼을 품게 된다.

스가랴: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대하24:22)

=> 스데반는 용서했고 스가랴는 갚아달라 말했다.

왜 죄를 짓는가? 죄의 값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죄의 값에 대해 피상적, 추상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아벨의 피: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4:10)

예수님의 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12:24)

=> 아벨의 피는 복수의 피. 예수님의 피는 죄를 씻는 피.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2:19)

=> 당시 1차 청중은 노예다. 그들은 태생부터 억울한 인생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으라, 순종하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20)

=> 아룸다움=은혜. 선을 행하고 고난을 받으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줄 계기가 된다. 영적 매력을 드러낼 수 있다. 이보다 더 큰 아름다움은 없다.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셨다, 십자가보다 더 억울한 일이 세상에 어디있는가?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2:23)

=>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참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시기 때문이다. 믿음: 하나님께서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것.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한 번 생각해보자. ➀내가 정말 손해봤는가? ➁만약 그렇다면 얼마나 손해봤는가? 우리는 누군가를 뒤에서 죽일 듯이 험담한다. 뒷말을 할 때 과장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정작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나에게 손해를 끼친 일은 드물다. 만약 손해를 끼쳤다고 하더라도, 정말 그 정도로 손해를 내가 입었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공의의 하나님을 생각하자! 하나님께서 상 주시는 이심을 기억하자! 하나님께 심어야 하나님께 상을 받는다.

마음 속에 억울한 일이 많은가?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산다는 방증.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

요셉: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창41:51-52)

=> 요셉이 망각한 것인가? 아니다. 요셉은 억울한 일을 기억하고 있다. 다만 요셉은 그 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지 않다. 그 일로부터 자유롭다. 왜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원수는 누구인가? 나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이다.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다. 이는 계속 손해보라는 뜻이다. 손해를 볼수록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크다. 가장 큰 상을 받게 된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수지 맞는 장사다. 손해보다 더 큰 이익을 하나님께서 주신다.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간다. 다른 사람이 나를 통해 예수님을 본다. 가장 큰 영광이다.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차이: 사랑하는 사람은 유익을 상대방에게 둔다. 좋아하는 사람은 유익을 자신에게 둔다. 고양이는 쥐를 좋아하지 사랑하지는 않는다. 좋아하는 사람은 계산이 틀리면, 자신에게 해가 되면 바로 사납게 돌변한다. 나는 예수님을 좋아하는가, 사랑하는가?

억울한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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