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기술

작성자
윤휘종
작성일
2021-02-05 11:15
조회
1321

<이별의 기술>

많은 사람들이 만남의 기술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만남의 기술만큼 중요한 것은 이별의 기술이다. 왜냐하면 모든 만남에는 이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별 없는 만남은 없다. 설령 생애 중에 이별하지 않더라도, 결국 우리는 죽음으로써 사별하게 된다. 이렇게 이별은 우리 삶 속에서 필연적이다. 많은 청년들이 이별의 아픔에서 벗어나길 힘들어 한다. 이별에 대처하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늘은 이별의 기술에 대해 논해보겠다. 이번 시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치유되길 바란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사랑을 위한 처세술을 말하지 않듯이, 여기서 말하는 이별의 기술은 어떠한 처세술이 아닌, 이별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내지는 태도를 가리킨다.

1. 우리는 단독자로 살아간다. 

누구나 한 번은 어렸을 때,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려서 슬픔에 빠진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 물건과 똑같은 물건을 다시 구매하면 되는데, 왜 그렇게 상심할까? 바로 그 물건에 자기 자신을 투영해서 그렇다. 그 물건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마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과 같아, 깊은  상심에 빠지는 것이다. 이별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에 자기 자신을 투영했기에, 그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마치 내 신체 일부를, 마치 내 영혼 일부를 어쩌면 전부를 잃는 것과 같다.  내 삶을 지탱하는 한 쪽이 무너져 내렸기에, 우리는 이별로 인해 깊은 좌절감 혹은 우울감에 빠진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사람이 없어도 나는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일 수 없고, 네가 나일 수 없기에 우리는 외로움을 겪으며 살아간다. 외로움은 그 사람이 곁에 있으나, 곁에 없으나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독자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이 외로움을 어떻게 대하는냐'에 달려있다. 누구도 나의 길을 대신 걸어줄 수 없고, 누구도 나의 십자가를 대신 지어줄 수 없다. 자기 십자가는 자기 자신이 지어야 한다. 홀로 서 있을 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과 함께 서 있을 수 있다. 홀로 인생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I am that I am"이라 설명하셨다. 그렇다. 나는 '나'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 있다.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이자 상속자이다. 이런 정체성을 바로 가진 자는 누군가가 자신의 곁을 떠났다고 해도 결코 자기 삶을 파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자신의 '존귀함'을 알기 때문이다. 이 정체성은 절대적인 가치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곁에 있어도, 없어도 상관 없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누군지를 기억하고, 자기 상실감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의 삶은 존귀하다.

2. 소유냐 존재냐

프랑스의 실존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말했다. "우리의 인생은 Birth와 Death 사이의 Choice다." 그렇다. 우리 인생은 수 많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선택 대부분은 우연적이다. 오늘 아침 A를 선택할 수도 있고, B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렇게 많은 우연들이 우리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우리 삶 속에는 필연적인 것이 있다. 바로 우리의 영혼이다. 우리의 행동이 변할지라도, 우리의 영혼은 변하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영혼에 대한 관조이다. 그 사람의 행동 때문에,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나한테 잘해줘서 또는 내 곁에 있어줘서 좋아하는 것은 말 그대로 좋아하는 것이지 사랑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 사람의 행동과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사람의 유일한 영혼을 통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가치는 영원하다. 그 사람이 어떠한 행동을 할지라도, 그 사람은 그 사람이다. 에리히 프롬의 유명한 책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이 있다. 그렇다. 당신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는가? 소유인가 존재인가? 사랑이란 그 사람을 소유하는 것에 있지 않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존재 자체에 감사한다.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잊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단점을 생각하라고 하는데 그것은 그다지 좋지 않은 방법이다. 실제로 외국의 한 실험결과, 누군가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게 한 집단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한 집단이 훨씬 훗날 감정의 동요가 적었다고 한다.  짧고 험한 인생 광야 중, 일평생 기억할 수 있는 순간을 선물로 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하자. 서로를 피상적으로, 추상적으로 아는 사회에서, 나를 본질적으로, 경험하여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에 감사하자.

3. 결과는 하나님께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가 바로 우상숭배이다. 우상숭배란 단지 어떤 형상 앞에 절하는 좁은 개념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우상숭배란 바로 자기숭배 곧 자기사랑이다.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것은 자기사랑이다. 왜냐하면 결국 자기 유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집착도 마찬가지다. 집착이란 지나친 자기 연민이다. 그 사람의 부재가 곧 내 인생을 파멸시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상실감이라는 수렁에 빠지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 신실하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집착이란 자기 인생의 주인을 자기로 모시는 것이고, 자기 계획대로 인생을 살고자 하는 의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려는 자에게 찾아오는 감정이 불안과 두려움, 조급함이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주권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영광을 위해 일을 이루고야 마시는 분이시다. 만약 그 사람과의 만남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확장시킬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과의 만남을 허락하실 것이다. 만약 자신의 욕심이라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자신의 뜻과 계획은 내려놓고, 모든 결과를 "I will that I will", 일을 이루고야 마시는 하나님께 맡겨드리자.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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