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헤아리고 있니 ?

작성자
조정희
작성일
2021-07-10 07:50
조회
1263
이제 드디어 코로나가 끝나가고

일상으로 회복이 되는가 !!

설레이기까지 했는데

또 다시 코로나가 몰려와서

모든 예배가 비대면으로 전환된 상황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20% 소수의 인원만이 예배 드리던

그것 마저도 안 되고

이제 교회 문을 걸어 닫고

온라인으로만 드려야 되는 상황 속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오죽 했으면....

이렇게까지 하실까 !!

이번주 사랑방 공과 주제처럼

내 마음 좀 깨달아라 !!

내 마음 좀 헤아려주면 좋겠구나 !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합니다.

유다 민족의 반복되는 범죄 속에서

예레미야가 20여 년 동안 활동하며

회개를 촉구하지만

여전히 돌이키지 않고 듣지 않았기에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된 그들...

돌이키라 !! 돌이키면 회복할 것이다

하는데

도무지 듣지 않는 그들 ....

쓸모없는 무화과처럼 된 그들을 향해서

그들이 새롭게 돌이키면

다시 심고 나의 마음을 너희에게 쏟겠다라는

하나님의 진정성 !!

그들을 새롭게 변화시키기 위해

그 모든 고통의 과정을 선용하신 하나님의

그 진한 사랑이...

오늘 지금 이 시대...

코로나로 인한 혼돈의 시대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들에게도

나에게도...

똑같이 선언되는 말씀 이리라 생각됩니다.

새벽기도 때 목사님이 드렸던

간절한 기도를 옮겨봅니다.

어느 것도 하나님의 통치 앞에 무릎 꿇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 입니다.

하나님!!

코로나 팬데믹 상황속에서

우리가 더욱 겸비하고 기도하며

이 땅을 회복하고

이 땅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선언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선언되길 소망합니다.

역사의 주권자.

내 인생의 주권자 하나님

전염병에 의해서 우리의 자유가 제한되는 상황 속에서

현실에 대해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주권 앞에 무릎 꿇고

통치 앞에 순종 하기를..

이 땅을 회복하시고 고치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신속히 드러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이 혼돈의 상황을 걷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기회가 되기를 !!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도 희망이 있는건

새벽을 깨우며 기도하는

동역자들이 늘 공동체에 존재한다는 사실이지요



기도 없이 살아 간다면...

우리 역시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바 없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넌  내 마음을   헤아리고 있는거니' ?

물으실때

네 ... 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

 

 

 

 

 

'그 사랑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지!'.....(엡3:14--21)

 

*그 사랑을 아는 삶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는 고백을 자주 합니다. ’독생자를 주셨다. 곧 유일한 아들을 주셨다‘는 말속에는 더 큰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때때로 하나님의 가슴을 하나님의 언어로 이렇게 표현하실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독생자‘라는 개념, 즉 ’유일하신 아들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의 사랑이 표현될 때 사실 제대로 이해하기에 우리에겐 한계가 있습니다. ’독생자‘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베푸셨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즉, ’독생자‘라는 말속에는 ’하나님 자신의 생명 이상의 것‘을 주셨다는 깊은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흘리고 처절하게 돌아가실 때, 나를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내주실 때 그분의 독백이 있었죠. ’엘리엘리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그것이 ’독생자‘입니다. 이말 안에는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생명이상의 것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라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전 인격적으로)

 

그렇습니다!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 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나를 변화시키고 그 사랑에 의해 우리는 진정한 삶의 동력을 얻게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기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독생자를 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내가 언제 하나님의 가슴을 경험했는가!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를 경험하고 얼마나 그 사랑에 감동하며 살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그 사랑의 깊이를 경험했습니까? 언제 그 사랑을 깨닫고 감동되어서 모든 삶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의 진정한 가치를 ’경험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경험하여 알고 그 사랑에 감동되어 내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위탁하는 삶, 그 사랑에 끊임없이 순복하는 삶을 ’신앙생활‘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전인격적인 사랑의 표현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 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 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 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4-47)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한 여인의 스토리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계셨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많은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과거에 나병 환자였다 치료를 받았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대접하고자 집에 모시지만 상황을 보면 그에게는 예수에 대한 감사와 사랑, 그로 인한 감격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예수님을 모신 이유는 예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된 잔치를 위해셔였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내가 치유받았다. 난 이제 자유하다. 나는 다시 바리새인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선언하기위해 예수님을 상대적으로 이용하고 싶었을 뿐, 그곳에는 감동과 감사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바리새인과는 대조적으로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성경은 이 여인을 ’죄인인 한 여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돌아와 그 발 앞에 무릎 꿇고 향유옥합을 깨뜨려서 그 발에 붓습니다. 그리고는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고 입을 맛춥니다. 이 광경을 보는 바리새인은 죄인인 이 여자를 예수께서 과연 용납하실까에 모든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 제자들마저도 여자를 향하여 값비싼 것을 허비하였다고 질책하지만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이 정죄하는 이 여인의 ’모든 섬김‘을 기꺼이 수용하십니다.

그것은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사람들의 정죄를 받는 죄인이었지만 여인은 ’사랑을 많이 받았고 그 사랑을 경험했기에 그 사랑에 대해 이러한 반응을 보인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그 사랑을 아시고 모두 수용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신앙입니다.

과거에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했던 바리새인과 주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닌 제자들처럼 예수님에게서 받은 그 사랑에 대해 사랑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공로이며 자기 욕망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신앙생활을 단지 열심히 해온 기간으로 여기고 그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많이 경험하여 깨달았으며 그 사랑에 대해 어떤 삶으로 응답하며 살고 있는지가 신앙생활의 핵심일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이 보이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하나님께 대한 감동’입니다. 즉 사랑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가슴 속에 지금도 십자가에 대한 감동이 존재합니까? 온통 공로만 남아있다면 주님을 모셔두고는 은근히 자기 과시만 하고자했던 ‘바리새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상의 관심은 여인이 어떤 죄를 지어 죄인이 되었는지에 쏟아지지만 예수님에게 그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감동으로 순복하는 이 여인의 태도에 관심을 갖습니다. 이것은 이 여인의 진정한 신앙의 성숙을 보여주는 ’회복‘이었고 ’영성‘이었고 또한 예배였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변화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엡3:16)

 

1)속 사람이 강건케 됨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은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삶의 변화들이 16절에 나타납니다. 내가 진정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내 속사람의 능력으로 강건해진다는 이 말은 역설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강건해지는 것은 내가 ’깨질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내 자아가 깨지고 내 자아가 사라질 때 비로소 나는 가장 강건해집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의 고백에도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는 과거 율법주의와 자신의 우월함을 끊임없이 증거하는 삶을 살았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더 많은 사람을 잔해하기 위해서 다메섹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순간. 바울의 모든 자아는 완전히 깨어져버리고 맙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가 그 깨어진 자아 속으로 들어와 세워지기 시작하죠. 그가 자신의 의로움으로 스스로를 높이며 살았을 때 그는 가장 초라한 존재였습니다. ’죄인의 괴수‘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만난 후 그 자신은 철저하게 깨어지고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 할 때에 오히려 그는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나는 죽고 내안에 예수가 사는 것, 내 자아가 깨어지고 내 모든 공로가 사라지고 오직 은혜만 남는 것! 이것이 그 사람의 진정한 강함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자아가 강한 것을 은근히 과시합니다. ’나는 내 신념이 있어 내 의지가 있어!‘

하지만 성경은 내 자아가 깨어지고 텅 비워진 채 오직 은혜만 가득 채워지는 삶을 ’강한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은혜에 대해서 감동으로 사는 그 삶이 진정으로 강한 삶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나의 자아는 깨지고 죽어 이제는 나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 예수가 사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삶, 내 공로, 내 의로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삶. 오직 은혜만 남아있는 그러한 삶을 성경은 진정으로 자유한 삶이며 강건한 인생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병든 영혼 속에는 은근한 자기 과시가 있습니다. 병든 영성에는 은근한 자기 공로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건강한 영혼, 진정한 영성 속에는 언제나 은혜만 남습니다. 감동만 존재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강력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영성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7-19)

 

이 말씀을 쉽게 전하면, ’우리의 자아가 다 깨어지고 내 공로와 내 열심이 아닌 사랑만이 가득히 채워질 때 우리가 진정한 크리스찬이며 영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1차 구금된 상태에서 에베소 공동체 동역자들에게 무엇을 간절히 갈망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환경, 조건. 어떤 공로로 열심히 하는것이 아닌, 내가 사나 죽으나 오직 하나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십자가의 공로로 존재함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감동으로 살아갈 때 그것이 우리의 영성이 되고 진정한 신앙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바울은 간절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대화를 해보면 그 사람의 영성의 깊이가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의 간증을 들어도 그 사람의 영적인 깊이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고린도서 6장 2절에 보면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고 말씀합니다. 과거에 내가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지 어떤 은혜를 경험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나의 상태입니다. ’지금 나는 어떤 은혜의 삶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감동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러한 고백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점점 고갈되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동이 있는 진정한 열심은 우리를 고갈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우리가 세워지는 은혜를 공급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알고 그 사랑에 대한 감동으로 매 순간 우리가 순종하고 순복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왜 나를 사랑하시는지, 왜 내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셨는지, 또 왜 내게 소중한 사명을 주셔서 감당케 하시는 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은혜‘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라!

공로는 우리가 병들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삶! 이것을 성경은 신앙의 가장 소중한 강건함이요.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공동체에게 비록 자신이 구금되어 있지만 가슴 속엔 그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와 높이와 넓이와 깊이를 깊이 경험하는 시간을 누리고 있음을 하나하나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가슴 속에도 그 사랑이 충만합니까! 감동으로 존재합니까!

고난이 오고 절망적일 때 그 상황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대해 불평하고 원망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상황, 어떤 처절한 삶의 현실에서도 진정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오직 은혜만이 존재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참된 순종, 헌신, 예배

’내가 지금 왜 이런 고통을 겪는가. 왜 이런 상황에 왜 처해 있는가‘ 원망이 나오기 시작하면 인생은 더욱더 동굴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터널은 지나가면 끝이 나겠지만 동굴은 들어갈수록 더 어두워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고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의 그 길이와 깊이와 넓이, 높이를 경험하면 거기에는 새로운 감사와 감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인생에서의 새로운 전환점을 경험하게 합니다. 이것이 그 신앙의 영성이며 진정한 신앙의 관점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브라함-모리아 정상에서의 아브라함(창22장)

창세기 22장에는 ’모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모리아라는 말은 ’모리와 유아‘가 복합된 단어입니다. ’여호와께서 보신다‘라는 뜻입니다. 단순하게 어떤 땅의 명칭을 넘어 ’하나님이 보신다‘는 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충분한 사랑

창세기 22장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복종의 시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00세 때 얻은 아들 이삭을 저 모리아 땅 산에 가서 번제로 바치라 명하십니다. 조금의 의심이나 망설임 없이 아브라함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 안장을 지우고 길을 떠납니다. 사흘 만에 그 모리아에 이르죠. 그리고는 산에 올라갑니다. 아들이 묻습니다. ’아버지 나무는 제가 지고있고 번재에 쓸 칼과 불은 아버지가 갖고 계시는데 가장 중요한 번제에 쓸 양이 없어요‘ 그때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라고 대답해 줍니다.

모든 상황을 이미 다 아는 우리는 ’여호와 이레‘로 ’수풀에 걸린 양‘을 떠올리지만 당시 아브라함은 자식을 잡을 수밖에 없는 극한 상황을 끊임없이 상상했을것입니다. 드디어 아들을 결박하고 그 가슴에 칼을 겨누는 그 상황은 아브라함에게 닥친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아 네 독자 이삭에게 네 손을 대지 마라. 네가 이제야 나를 경외하는 것을 알았다‘ 하십니다. 하나님이 정말 모르셨을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명령한대로 순종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깊이를 다 아시면서도 왜 그러한 요구를 하셨을까요. 이것은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을 깨우쳐줍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그 사랑을 힘입어 75세 때부터 부름받아 하나님의 은혜 앞에 끊임없이 성장하며 성숙해져갑니다. 그 성숙의 정상이 바로 모리산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이고 그 사랑에 대해 이렇게 순종하는 모습으로 응답했다는 것을 우리 앞에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의 그마음이 마음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신뢰하는 사람의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대단한 믿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그럴 만한 사람인가요. 과거 자기 아내를 두 번이나 팔아먹었던 사람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그토록 형편없는 아브라함을 사랑하셔서 이렇게 성숙한 사랑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아브라함으로 이끄셨는지입니다. 과거 아브라함을 생각한다면 그는 100세 때 얻은 자기 생명 이상의 존재같은 이삭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사랑에 대한 그의 ’변화‘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아브라함의 점진적인 변화!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아브라함을 이렇게까지 성화되고 성숙한 삶으로 변화시킬 만큼 강력하다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오늘 그 사랑으로 충만 할 때

하나님의 그 사랑이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우리도 그 사랑을 지금 힘 입고 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헌신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움직이는 삶의 동력입니다. 돈을 사랑하면 돈 때문에 열심을 내고, 취미를 사랑하면 취미 때문에 열심을 냅니다. 사랑을 받은 만큼 그 사랑에 대해서 우리는 반응해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만큼 그 사랑에 대해 감동으로 반응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내가 경험함 그 사랑에 감동하며 매 순간 십자가 사랑을 더 바라보고 십자가 사랑이 실현 되기를 염원하는 간절함이 우리 속에 존재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 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엡3:20)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우리는 자꾸 구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구하는 것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 보다 더 넘치도록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감사하고 그 사랑에 대해서 끊임없이 감동하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넘치도록 주십니다.

*다윗--하나님으로 충만한 가슴

다윗은 17살 때 양치기였습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고 사랑했습니다. 그의 가슴 속에는 장차 왕이 되고 싶어 하는 그런 열망이 없었습니다. 그저 그는 아버지의 명령대로 양을 치는 막내였습니다.

어느 날 사무엘이 왔을 때 아버지 이새는 아들들을 다 불러 모았지만 광야에서 양을 돌보는 다윗은 부루지 않았습니다. 비록 하찮은 존재였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뜨거웠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다윗은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왕이 되어서도 그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것이 다윗의 삶의 가장 핵심이었습니다. 물론 그랬던 다윗도 실수하고 실패하며 크나큰 죄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이 저지른 범죄에 초점을 두고 그들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드렸던 사랑만을 기억합니다. 왕이 되어 여호와의 법계를 모셔올 때 왕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 기쁨에 춤을 추었던 다윗의 그 감사와 사랑의 표현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도 그 사랑에 ’감동‘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도바울은 1차 구금된 상태에서 에베소 공동체에게 ’왜 그렇게 죄 가운데서 점점점 휘말려 갑니까, 왜 그렇게 세속화되고 있습니까. 왜 그렇게 육체적인 삶으로 전락합니까‘라고 나무라지 않습니다. 그가 간절히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그 사랑에 대해서 얼마나 감동하고 삽니까? 여러분이 그 사랑의 길이와 넓이, 높이, 그리고 깊이 더 많이 경험하고 그 사랑 안에서 더 살아가기를 바랍니다‘라는 염원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요소는 그사랑의 농도, 그 입체적인 사랑을 경험하고 아는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얼마나 그 사랑에 대해서 감동하며 오늘을 살아가십니까?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영성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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