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으로서의 복음 -故박정식 원로목사님의 신학을 위한 소고-

작성자
윤휘종
작성일
2024-04-09 10:51
조회
371

실존으로서의 복음 -故박정식 목사님의 신학을 위한 소고-

1. 실존철학과 목사님의 삶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다." 최후의 근대 형이상학자 헤겔의 말입니다. 우리의 세계 이면에는 초시공간적이며 영원불변하고 절대적인 원리가 뿌리박고 있다는 뜻입니다. 헤겔은 그러한 원리를 "절대정신"이라고 부릅니다. 헤겔의 절대정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절대정신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파악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절대정신, 즉 신적 정신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존철학의 창시자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헤겔의 사상에 반기를 듭니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신앙이란 이성에 의해 개념파악되는 것이 아닙니다. 즉, 키에르케고르에게 신앙이란 우리의 합리성을 초월한 어떤 것이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신앙의 초월성을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찾습니다. 모리아 산상에서의 아브라함의 행위는 모든 면에서 비합리적이며 역설적인 행위였습니다. 그것은 도덕적 임무, 사회적 임무로 인해서 수행된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들 앞에서 올바로 서기를 원하는 데 급급한 도덕인이 아니었습니다. 대신에 그는 하나님과 절대적인 관계를 맺고 오로지 주님의 뜻에만 따라 행동하기 원하며 그 외 다른 모든 것은 단지 상대적이며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기준으로는 인준될 수도 없었고, 이해될 수도 없었던 전적으로 개인적이며 절대 특수한 행동이었습니다. 모리아 산상에서 아브라함은 다수의 인간들 앞에 서 있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오로지 하나님과 독대하고 있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그를 두고 "신 앞에 선 단독자"라고 부릅니다. "신 앞에 선 단독자"란 바로 코람데오의 삶을 사는 자입니다.

"단독자. 이 범주에 기독교의 성쇠가 달려 있다." -키에르케고르-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을 촉발하게 한 원인은 종교적 삶이 지나치게 세속화되고, 너무 형식적 계율에만 집중하게 되었으며, 종교적 제도에 너무 많이 지배되고 말았다는 루터 자신의 견해였습니다. 루터가 강조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개인의 인격적 관계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철학은 전적으로 이러한 루터의 정신에 입각했습니다. "신 앞에 선 단독자"로 살아가는 것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적 화두는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가"였습니다. 그에게 신앙이란의 문제가 아닌,의 문제였습니다.

인간은 실존입니다. 여러 실존철학자가 있지만, 실존철학은 인간의 실존을 만인에게 공통된 인간의 본질 또는 인간성이라는 한 공통분모로 환원시킬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된 지론은 인간이 개성과 독자성을 소유한 절대 특수한 개별자로서 자율성과 독창성을 지닌 고유한 인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뜻에서 키에르케고르는 "단독적인 개인은 [인간 일반이라는] 보편자보다 더 고차원적이다"라고 선포했으며, "인간은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제반 종류의 우월성으로 인해서만 여타 동물류와 구별되는 것이 아니고 개인, 즉 단독적인 개인이 [인간이라는] 종 이상의 존재라는 데서 동물들과 질적으로 구별된다"고 역설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르트르 또한 그러한 뜻에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습니다. 스페인의 실존철학자 우나무노는 이러한 실존적 인간을 "뼈와 살을 지닌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개인의 고유한 실존적 특징은 보편적인 이성에 의해 파악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에게 실존이란 "죽음을 향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신이 실존인지 모른 채 살아갑니다. 즉, 타인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기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자신의 존재의미를 망각한 채 그저 군중 속에 파묻혀 타인의 인생을 살며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그러나 타인의 죽음을 나의 것으로 삼는다면,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음에 앞서간다"면 우리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루하루 나 자신으로서, 실존으로서 살아가고자 합니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란 책은 인간이 죽음을 앞두게 될 때 삶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죽음 앞에 발버둥 쳐봤자, 인간은 스스로 죽음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인간은 죽음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유한하고 무능하고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절망을 두고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 앞에 우리에게는 유일한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절망을 치료하는 유일한 치료제는 바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야스퍼스는 인간은 죽음과 같은 "한계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말합니다. 오로지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미래의 부활뿐만 아니라, 현재의 부활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절망은 감격으로 전환됩니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故박정식 원로목사님(이하 목사님)의 삶은 실존철학적 신앙, 즉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의 삶을 잘 보여줍니다. 또래 친구들이 생을 논할 때, 목사님께서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계셨습니다. 그러한 한계상황 속에서 들려진 복음은 목사님의 전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목사님께서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실존으로서 즉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그때 들려진 복음의 감격을 일 평생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아내셨습니다. 항상 복음 앞에 감격하고, 자신의 전 생애를 주님께 바치며, 자신의 계획을, 미래의 계획을 앞세우지 않으며, 사람들의 조언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들려오는 말씀 앞에 무릎 꿇은 목사님의 삶은 바로 코람데오의 삶이었습니다. 목사님에게 복음관념이나 이론이 아니라, 이요, 전 인격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뼈와 살을 가진 인간이 복음에 감격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삶으로 보이셨습니다. 그렇게 목사님은 우리에게 단독자의 귀감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님은 마땅히 진리의 공언자라 칭함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다음 본문에서는 목사님의 구체적인 가르침이 어떻게 실존철학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 실존철학과 목사님의 가르침

2-1) "한 사람"

목사님께서는 "얼마나 많이 모이는가"가 아닌, "누가 모이는가"라는 질문에 우리교회가 답하길 원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교회가 성장한 이후에도, 주일예배 드리는 성도의 수를 대강 파악했을 뿐 정확한 전 교인의 수를 세지 않으셨습니다. 천막교회 시절부터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지금까지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에게 성도의 수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작년보다 성도의 수가 얼마나 증가했는지'를 교회의 성장의 척도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목사님은 목회의 초점을 "한 사람"에 맞추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목회의 방향성을 교회의 "양적 성장"이 아닌, "질적 성장", 즉 "한 사람이 말씀 앞에 어떻게 변화되는가"에 두셨습니다. 은사 중심의 사역에서 제자훈련으로 목회의 방향을 전환했을 때, 성도가 사모님 "한 사람"만 남았음에도, 제자훈련 중심의 목회를 포기하지 않으신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목사님이 소망한 교회의 모습은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가 아닌, "유일한 교회"였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에 관심을 두신 목사님께서는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성도들과 함께 비전트립을 떠나셨습니다.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한 두 시간 정도는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종일 2주 내내 붙어있다면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없습니다. 자신의 민낯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목사님께서는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기에 주저함이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과 관계맺는 것이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등을 보이신 목사님께서는 단지 강대상 위에서 청중으로서 성도들을 대하시지 않고, 삶 속에 들어와 선한 목자로서, 스승으로서, 동역자로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과 관계맺으셨습니다. 단지 자신의 등을 보일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간증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관심을 두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성도들을 "무리"로서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대하셨습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삶 속에 들어옴으로써 목사님과 성도들은 "동역자"라는 관계로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 선한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고유한 특징을 알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양 한 마리는 "one of them"(무리 중 하나)이 아닌, "only one"(유일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선한 목자의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막연하게 무리로만 보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으로 보고 상대합니다. 하나님이 무한자이며 우주의 대 주재라 할지라도 지극히 작은 한 인간도 홀대하지 않고 친아버지와 선한 목자로서 잃어버렸다 되찾은 이 한 마리의 양에게 하듯이 인격적으로 대하고 품어주며 보살펴주십니다. 개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일이 눈동자처럼 귀하게 보살펴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무리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특수한 개인들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개인은 결코 인간이라는 보편개념 이면에 감추어져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는 "단지 하나의 질적 개인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다 이것과 관계되는 문제다."

 

2-2) "듣는 마음"

"듣는 마음." 목사님께서 신앙 생활에서 가장 중요시 여긴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지금 들려오는 말씀이 있는가, 지금 들려오는 말씀에 순복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지금 들려오는 말씀이 없다면, 그것은 신앙이 위기에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목사님께서는 "듣는 마음"을 강조하셨을까요? "듣는 마음"과 대비되는 개념은 아마 "읽는 이성"일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듣는 마음"을 강조하시면서 믿음은 "읽음"이 아닌, "들음"에서 나온다는 성경말씀을 자주 인용하셨습니다. "읽음"도 당연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읽음"에는 모종의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읽음"은 자발성입니다. "읽을 때", 읽는 주체는 바로 '나'입니다. 읽는 행위의 중심에는 '나'가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이해하고 싶은 대로의 말씀만 읽고 느끼게 될 수 있습니다. 자칫 '나' 중심적인 읽음은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나와 그것'의 관계로 전락시킬 위험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 중심으로 성경을 읽을 때, 온전하신 하나님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나의 이성에 의해 개념파악된 하나님만을 보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읽는다면, 그러한 만남 속에서 하나님은 칼 바르트의 '절대타자로서의 너'가 아닌 '그것'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내가 만든 신인 것이죠. 나아가 이 관계 속에서 '나'도 더 이상 '나'가 아니라, '그것'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결국 읽을 때는 '그것과 그것'의 만남이 성사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나'는 나의 연약함, 부끄러운 모습, 숨기고 싶은 모습, 있는 그대로의 '나'에 찾아오신 하나님과 만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이성으로서, 나에 의해 개념파악되는 '그것(대상)'으로서 파악하고자 할 때, 구체적인 '나', 연약하고 부끄러운 '나'의 모습은 사상됩니다.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나’가 익명적 ‘나’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말고도 보편적인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파악할 수 있는, 그런 만남이 조성되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헤겔은 이 점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보다 보편타당하며 객관적인 것을 항상 절대시한 헤겔은 단지 만인이 만인에게 공통되며 신에게도 타당한 사유의 법칙에 따라 신 앞에서 자기반성을 하는 가운데 자신과 진리를 알아야만 하며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보편적인 도덕적 원칙과 규범에 따라 타인과 신 앞에서 행동하고 살아가야만 한다고 볼 따름이었습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 이성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자 할 때, 골수를 찔러 쪼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역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공동체의 말씀을 시시하게 여기고 좀 더 고차원적인 말씀을 원한다며 공동체를 벗어나 스스로 혹은 외부에서 성경과 신학을 공부하려는 태도를 비판하셨습니다.

이와 반대로 "듣는 마음"은 수용성입니다. 듣는 마음의 중심에는 내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찾아오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숨기고 싶고, 인정하기 싫은 삶의 한복판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찾아오시고,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오로지 들려오는 말씀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인식이 가능합니다. 들려오는 말씀은 내가 취사선택한 말씀이 아닙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의 하나님께서 친히 나를 찾아오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비로소 마틴 부버가 말한 '나와 너'의 인격적 만남이 성사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의 절대타자로서의 '너'의 하나님과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가 듣는 마음속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러한 만남 속에서 나의 연약함이 드러나고, 그러한 연약함을 마주하며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를 고백할 때,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역사가 우리의 삶 속에 임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목사님께서 공동체 예배 속에서 목회자를 통해 객관적으로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목사님께서 아예 지식을 거부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는 종교개혁(목사님께서는 신앙개혁이라 불러야 한다고 말씀하심) 500주년 기념 설교에서 알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information'(정보)이 쌓이면 'deformation'(기형)을 낳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많아진 지식을 가지고, 그 지식을 '나'가 아닌 '너'에 겨냥할 때 발생한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지식을 통해 나를 돌아보지 않고 상대방을 정죄하는 데만 쓴다면 괴물이 된다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을 통해 '나'를 돌아본다면 그것은 'reformation'(개혁)이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지식을 쌓으되, 그것을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삼는다면 지식은 선용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묵상할 때, "주님, 제가 듣겠나이다, 제게 말씀하소서"라는 겸비함으로 읽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읽음"이 아닌, "들음"일 것입니다.

 

2-3) "오늘의 은혜, 오늘의 말씀, 오늘의 무릎"

"신앙은 경험이 아니다. 신앙은 영성이다." 신앙에 관한 목사님의 유명한 명제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경험, 경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쌓입니다. 한 번 쌓은 경험, 경력은 평생 지속합니다. 경험이 많을수록 더 일을 능숙하게 할 수 있습니다. 경험이 없는 자는 결코 경험이 많은 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 일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영성은 다릅니다. 기라성 같은 신앙의 위인도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초신자가 중직보다 더 은혜 앞에 감격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성은 매일매일 끊임없이 새롭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는 실존(Existenz)을 현존(Dasein)으로도 부릅니다. 독일어 'Da'는 '지금', '여기'를 말하고, 'Sein'은 존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Dasein'은 '지금, 여기 있는 존재'입니다. "지금, 여기"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시시각각 변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가 한 순간에는 카페일 수도 있고, 다른 순간에는 은행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순간에는 집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지금 여기"는 운동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운동하는 존재입니다. 실존철학은 인간을 정적이고 항구적인 존재가 아니라, 역동적이고 생동적인 존재로 파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어제의 경험에 의존해 오늘을 살 수 없습니다. 어제의 말씀에 의존해 오늘을 살 수 없습니다. 어제 기도했다고 해서 오늘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오늘의 은혜, 오늘의 말씀, 오늘의 무릎"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어제의 신앙이 오늘의 신앙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는 "내가 왕년에...", "나도 한때는..."이란 말을 하면 안 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했듯이, 신앙은 이 아닌 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본성은 변화입니다. 오늘은 완전히 새로운 하루입니다. 그런 이유로 목사님께서는 비전트립에서 항상 "하나님 아버지,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오늘을 선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으로 출발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이러한 목사님의 영성론을 이해한 자는 결코 신앙생활 속에서 '자기 의'를 쌓아갈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신앙의 경력과 경험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성은 그 본질상 쌓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목사님의 자기관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나 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자기관리가 아닌, 영성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목사님의 영성론의 정점은 코로나 팬데믹 사태에 드러났습니다. 당시 목사님께서는 비전트립을 통해 청년들과도 교제할 수 없으셨을 뿐만 아니라, 본당도 폐쇄되어, 홀로 텅 빈 예배당을 바라보시며 설교하셨습니다. 그때 목사님께서는 어떤 심정이셨을까요? 그때 목사님께서는 철저한 고독 가운데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셨습니다. 당시 새벽에 평소보다 매일 1시간에서 2시간 정도 일찍 오신 목사님께서는 홀로 "오늘의 말씀" 앞에 나아가시고, 설교가 끝난 후에도 한참이나 "오늘의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당시 온라인을 통해서 제가 바라본 목사님의 뒷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오늘의 은혜"에 감격한 뒷모습이었습니다. "조셉 얼라인처럼" 살고 싶으시다는 목사님, 이제 저는 고백합니다. "목사님처럼 살고 싶습니다."


-2024.04.09(화), 사랑받은 제자 올림-


참고문헌

김종두,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사상과 현대인의 자아 이해>, 새물결플러스, 2015.

클래어 칼라일, 임규정 옮김, <키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 입문>, 서광사, 2015.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