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입은자..

작성자
임형수
작성일
2024-04-06 02:13
조회
121
성찬식이 있는 부활 주일이었습니다. 그 어느 성찬식 때와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주님께서 저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증 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준비하신 빵을 두 손으로 찢는 모습에서 마치 이 천년 전 예수님께서 친히 빵을 찢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 같은 연상이 되어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매년 치러지는 종교적인 행사가 아닌 참된 의미의 성찬을 통해 친히 주님께서 찢겨진 빵과 부어진 포도주가 되어 주셔서 죄인인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신 크신 은혜를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고난주간을 관통하면서 머문 말씀의 은혜가 부활주일 예배 말씀의 은혜에 더하여져 더욱 깊고 짙은 은혜를 누리는 한 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풍성한 은혜 가운데 한주의 끝자락까지 계속 따라다니는 풀리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우리에게 던져 주신 말씀 주제인“나는 은혜 입은 자로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 보아도 결국 돌아오는 저의 대답은“ NO”였습니다.

저에게 있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오직 성전 안에서만 풍성하게 누릴 만큼만 누립니다. 성전 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답게 살아갑니다. 경건한 척, 선한 척.. 나의 하나님은 오직 성전이라는 국한된 한 장소에서 한 형태로 머물고 계신 분이십니다. 완연한 우상숭배입니다. 성전을 제외한 모든 영역에서는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삶 가운데서는 아주 편하게 살아갑니다. 내 뜻대로 행하며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 되어 온갖 더럽고 추잡스럽고 악한 말과 행동을 하며 살아가다가 주일이 되면 또 다시 은혜 입은 자로 돌아갑니다.

저는 그렇게 주일에만 은혜 입은 자로 살아갑니다. 성전 안에서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만큼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는 은혜 입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저의 모습에 순간순간 소스라치게 놀라며 좌절감과 패배감을 맛보며 살아가기가 일쑤입니다

맞습니다. 삶에서는 전혀 은혜 입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내지 못하기에 사탄은 이런 저의 연약한 마음과 생각에 틈타 들어와 좌절감과 죄책감을 교묘하게 심어 놓습니다. 이번 주일 말씀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사탄은 예나 지금이나 자신들에게 맡겨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 하나님 앞에 나아가 끊임없이 정죄하고 참소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매일매일 저를 향해 끊임없이 더러운 배설물로 오염된 옷을 입고 있는 저를 향해 정죄하고 참소하기 때문에 항상 죄책감과 자괴감에 빠져 있게 만듭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와 같은 보잘 것 없고 쓸모없는 저를 건져내 주셔서 저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므로 제가 가지고 있던 끔찍한 죄악을 제거해 버리시고 의의 옷이라는 정결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셨지만 저는 여전히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결하고 아름다운 옷을 죄의 오염으로 또 다시 더럽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저의 그런 연약함을 놓치지 않고 저를 무던히도 정죄하고 참소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영원히 은혜 입은 자임을 망각하게 하여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는 수작을 부리고 있는데.. 자꾸만 넘어가고 맙니다. 그래서 자책하고 실망하고 스스로를 정죄합니다

하지만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놀라우신 주님의 은혜로 인한 위안과 위로를 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참소하는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친히 변호해 주시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주님께서는 여호수와를 변호해 주심과 같이 동일하게 지금도 저를 위해서 사탄의 참소로부터 지켜주시고 변호해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저는 주님께서 주시는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사탄을 향해 당당하게 외치고 싶습니다. “ 아무리 나를 향해 정죄하고 참소해도 하나님께서는 너를 책망하실 것이다.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와 같은 쓸모없는 나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건져내 주셔서 친히 자녀 삼아 주셨다. 난 이제 정죄함 없다. 내게서 당장 껴져라!”

주님께서 이 천년 전 친히 이 땅 가운데 오셔서 십자가에 매달리어 희생제물이 되어 죄인 된 저를 위해 사랑을 확증해주셨습니다. 그 크신 사랑과 구원의 은혜가 없었다면 저는 사탄의 참소를 견디지 못하고 무겁고 무서운 죄책감과 정죄감에 사로 잡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친히 못 박은 장본인이 저라는 걸 아시면서도 끝내 희생제물이 되어 주셔서 저를 사망의 권세로부터 건져 주셨습니다. 다 타버려서 새까만 재가 되기 전에 꺼내 주신 것입니다. 이제 저는 주님의 은혜 입은 자로서 언약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담대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스가랴 선지자가 충격적인 장면을 목도 한 것처럼 저에게도 충격적으로 떠오른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여호수아가 입고 있는 옷이 그저 그런 더러운 옷이 아니라 온갖 배설물과 오물로 오염된 옷이라는 점입니다.그래도 대제사장인데..나름 하나님과 대면하기 위해 지성소를 들락날락 하는 사람인데..지금 이 시대로 치면 목사 또는 신부정도의 직분이 되는 건데? 나름대로 종교계에서 신앙의 경건과 영성으로 말하자면 일가견이 있는 권위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일 텐데..

하나님의 눈에 보시기에 그 정도라니.. 그럼 나 같은 사람은 과연 어느 정도의 옷을 걸치고 있단 말인가? 물론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든 인간이 죄의 경중과 종류와 형태에 상관없이 동일한 죄인이긴 하겠지만.. 내가 걸치고 있는 옷은 더 역겹고 추잡스럽고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있겠구나 생각하니 더 큰 충격으로 다가 왔습니다

충격의 연속입니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저에게도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정결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셨다는 것입니다. 더럽히면 또 다시 새 옷으로 갈아 입혀 주시는 주님의 다함이 없는 은혜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치“주님 오늘 하루를 망쳤는데 어쩌죠? 사랑하는 아들아~ 괜찮단다, 새날을 줄 테니 내일은 좀 더 잘 해 보렴” 하시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정말 은혜 입은 자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성전 안에서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말입니다

말씀 묵상을 마무리 하는 가운데 7절 말씀에서 개인적으로 그 은혜가 절정을 이룹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정결하고 아름다운 새로운 옷을 입히시고 내 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습니다. 주신 말씀에서 나의 생각, 판단, 고집, 내가 뜻하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걸어야함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규례를 따를 때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고 하십니다. 특히 내가 또 여기 섰는 자들 가운데에 왕래하게 하리라는 말씀이 가슴 설레게 다가왔습니다.

삶터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나의 가치관과 지향과 이정표의 잣대는 무엇인지 고민해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어렵고 힘든 고난의 여정을 관통하게 될 때 주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나의 생각과 판단이 앞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좌절하고 낙망하며 뒤늦은 후회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길을 따라 순종 할 때 하나님께서는 천군천사를 보내주시어 반드시 지키고 승리케 해주심을 다시 한 번 절실히 깨닫습니다. 여기 섰는 자들 가운데 왕래하게 되리라는 말씀이 저에게는 그렇게 들려졌습니다. 언제든 천군천사들과 교통 할 수 있는 친밀함 말입니다. 사탄의 참소와 유혹과 공격에 언제든 저를 대신하여 맞서서 싸워줄 하나님의 천군천사가 곁에 있으니 오늘 하루도 주어진 삶 가운데 온전히 주님만을 의지하며 승리하기를 소망합니다.

은혜, 은혜, 정말 끝이 없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 감격하며 감사하며 정말 은혜 입은 자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를 다시 한 번 깨닫고

얼마나 은혜 입은 자답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갈망하고 있으며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같은 무익한 종임을 깨닫게 해주신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