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예.누.4)(요10:11-16)

작성자
김미정
작성일
2024-03-29 17:55
조회
46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10:11-16)

*선한 목자와 삯꾼

예수님은 양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소개한다. 삯꾼은 악한 목자의 대명사이다. 삯꾼이란 주인이 그의 양의 지키라고 고용한 일꾼을 말한다. 고용주와 목자는 계약을 맺는다. 양을 잘 지키고 보호해야한다. 하지만 늑대가 떼로 몰려오면 목자(삯꾼)는 늑대를 물리칠 수 없다. 이 때는 양들이 해를 입어도 목자는 도망갈 수 있다고 미쉬나는 전한다. 목자가 감당할 수 없을 때, 생명을 위협받을 때, 도망가는 것은 비겁한 것도 아니고 무책임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삯꾼은 선한 목자와 대조의 의미가 아니다. 삯꾼의 악함이 포커스가 아니라 선한 목자의 그 특별함에 포커스를 두고 있다. 목자가 양의 생명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흔하지 않는 일이다. 양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 것은 쉽게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일이다. 최근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많이 키우지만 반려동물을 위해 희생한 주인에 대한 기사거리를 볼수 없듯이 말이다.

*다윗, 선한(특별한) 목자

구약에 등장하는 선한 목자가 있다. 바로 다윗이다. 블레셋이 이스라엘과의 전쟁 중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욕하였다. 다윗은 전쟁에 참여하려 하였지만 나이가 어려 거절당했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자신이 어떻게 양을 지켰는지를 설명한다.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고 쳐죽였나이다”(삼상17:34) 아버지의 양들을 보호하는 다윗, 그는 목숨을 걸고 쫓아가 사자와 곰을 죽이고 양을 구해냈다. 한 인간이 곰에게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윗은 생명을 걸고 싸웠다. 이것은 특별한 일이다. 자신의 생명보다 양들의 생명을 더 소중히 여겼기에 생명을 걸고 싸웠다. 그는 특별한 선한 목자였다. 그것을 보신 하나님은 그를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장으로 세우신다. 그 다윗이 하나님에 대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한다.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죽으심의 특징

① 자발적인 죽음

내가 스스로 버린다. 내 아버지께 받은 특권이다.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권세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신실하게 양을 지키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목자라고 하신다. 이것은 우발적인 죽음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정해진 바 되었다. 하나님의 뜻한 바 계획되었다. 우리 죄를 제거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이 땅에 오셨다.

② 대속적 죽음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 사랑을 십자가의 죽음 사건으로 나타난 바 되었다.

*인간은...

인간은 예수님이 선한 목자라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 속의 진리는 싫어한다. 그 진리에는 예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심과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왜 인간은 예수님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꺼려하고 싫어할까? 창세기의 아담은 선악과로 죄를 짓고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한다. 죽음을 맞이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 (끊어졌다) 관계가 깨어지며 인생의 주인 되심이 불편해졌다.

*내가 양들을 안다 하시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의 만남.

선한 목자는 숨겨진 양들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 안다는 것은 양들의 처지에서 양들을 생각해 준다는 의미이다. 이해를 넘어 동정하는 것을 뜻한다. 대표적인 사건. 갈릴리에서 유대 지역을 가려면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한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를 통과하셨다. 낮 12시, 가장 더운 때 우물에서 물을 긷는 여자.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또 동거하고 있다’ 그녀를 알고 계신 예수님. 그녀는 ‘이혼상습녀’이다. 그녀를 보는 사람들은 경멸하는 눈빛으로, 부도덕에 대한 쑥덕거림이 입에서 입으로 퍼졌을 것이다. 그녀는 사람이 없는 낮시간에 물을 길러 간다. 타인이 지옥처럼 느껴졌을 그녀를 만나셨다. 그녀가 그럴 수밖에 없는 질고가 있었음을 예수님은 잘 아셨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을, 누군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고 바라봐주기를 원하는 그녀의 마음을 아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 마음을 알고 계신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입고 포장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용납해 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를 얼마나 깊이 아실까?

아버지가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신다. 그 관계처럼 양을 아신다.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완벽하게 서로를 수용하신다.

예수님은 또 우리를 아신다고 하신다. 완벽한 하나됨을 이루시고 완벽한 상호지식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그 주님이 우리를 전부 아시고 우리와 하나됨을 이루기 원하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함께 함으로 주님과 영원히 하나됨을 이루고 주님을 완벽하게 알아가는 것 그것이 성화이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관계처럼 너와 나의 관계는 떼려 해도 뗄 수 없는 영원한 관계이다. 영원히 함께한다. 내가 선한 목자이기 때문이다.

*나 홀로 빈 들판에 서 있는 것 같다 느낄 때

나는 선한 목자란다/너의 눈물은 나의 눈물이고/ 너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란다/너의 죽음은 바로 나의 죽음이기에/나는 나의 양을 위해서 나의 생명을 기꺼이 버렸단다/네가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내 생명보다 너의 생명을 더욱 귀하게 여기는 선한 목자인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것을 기억하렴.

*이번주 설교말씀을 통해 목자되신 예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목자와 양은 늘 쉽게 이해되는 쉬운 말씀이라고 생각했는데 설교를 들으면서 양을 위해 목자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특별한 사랑이라는 것을 비로서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양을 끔찍하게 아꼈던 다윗, 그 다윗이 하나님께 대하여 목자라고 고백하는 그 마음 또한 너무나 절절히 드리는 감사와 사랑의 고백이였음을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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