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작성자
윤휘종
작성일
2021-02-15 12:11
조회
1861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우리나라에서는 스피노자의 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하지 않다. 오히려 서양에서는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의 말로 알려져 있다. 어느 것이 확실하지 않지만, 세계를 단지 원인-결과의 작용으로 파악한 스피노자의 말로 가정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스피노자의 말로 전제하고,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한 번 알아보도록 하자.

사람들에게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오늘 무엇을 하겠는가?"라 묻는다면, 사람들은 "놀이공원에 가서 신나게 놀 것이다"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겠다"고 답할 수도 있다. 어쩌면 더 나아가서 "범죄를 저지르겠다", "방탕하게 쾌락을 즐기겠다"고 답할지도 모르겠다. 다양한 대답이 나오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평소와 같은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바로 사람들의 평소의 삶 속에 괴리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삶 속에 괴리가 있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삶의 목적과 수단이 일치하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 삶은 수단에 불과하고, 목적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에서 의도하는 바는 무엇인가? 스피노자는 바로 '목적' 있는 삶의 부조리를 짚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보통 "삶 속에 목적을 가지라"고 말하고, 목적이 없는 필연적인 삶을 평가절하한다. 우리는 삶의 목적이 사라진다면, 삶의 가치가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묻는 것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평소에 하던 일을 하겠는가?" 스피노자는 목적이 있는 삶보다 목적이 없는 삶의 우위를 보여주고자 한다. 스피노자의 철학에는 목적이 없다. 삶은 단지 원인과 결과에 의해 진행될 뿐이다. 어제는 오늘의 원인이며, 내일은 오늘의 결과이다. 그렇게 진행되는 삶은 덧 없어 보인다. 그러나 목적이 있는 삶은 삶의 목적이 파괴될 때, 삶의 종말이 올 때, 더 이상 그가 추구한 가치를 계속 고수할 이유가 없어진다. 목적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인과관계에 의해 진행되는 삶은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내일 삶의 종국이 와도, 현재와 같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애초에 삶의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목적이 있는 삶에는 여러 도덕적 가치가 있어 보이지만, 내일 세계가 종말한다고 하면, 그러한 가치들은 상실된다. 우리가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는 도덕 조차 내일 세계가 멸망한다면, 아무런 의미를 잃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처벌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목적이 없는 삶은 세계가 종말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동일한 삶을 산다. 그 삶은 단지 필연적인 삶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오히려 목적 없는 삶 속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 속에서 목적을 제거해야 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목적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목적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삶이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자체가 되어야 한다.

다시 한 번,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서양 사람들처럼 루터의 말로 생각해보자. 루터는 바람 앞에 놓여있는 촛불처럼, 절대 권력 앞에서 위태로운 삶을 살았다. 그는 당장 화형에 처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며 살았다. 그런 그는 말한다. '내일 내 삶이 파괴될지라도, 나의 일을 하겠다.' 루터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명 앞에 응답하는 삶이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사명과 일치되었기 때문에, 모든 결과를 철저히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의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행했다. 그 외에 그는 다른 것을 바라지 않았다.

우리의 삶은 과연 어떠한가? 하나님의 사명 앞에 응답하고 있는가? 우리에게 신앙은 목적인가 수단인가? 우리에게 예배는 목적인가 수단인가? 예배가 세상의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인 사람은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면, 더 이상 예배를 드릴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내일 세상의 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예배 자체가 삶의 목적인 사람은,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예배를 드릴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 그 이상의 가치는 없기 때문이다. 예배가 목적 자체인 신앙인은 삶과 목적 사이에 어떠한 괴리가 없다. 반면에 예배가 수단이라면, 그 인생은 삶과 목적 사이에 괴리, 불일치가 있는 삶이다. 오늘 왜 무릎 꿇는가? 하나님의 임재 자체를 느끼기 위해서는가, 다른 무언가를 바라기 때문인가?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묻는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오늘 하고 있는 일을 내일도 하겠는가?"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