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예.누.6)(요14:1-11)

작성자
김미정
작성일
2024-05-06 21:58
조회
57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14:1-11)

*인생의 목적, 삶의 전부를 잃어버린 사람들

본문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음, 부활에 대해 얘기하셨다. 그들은 크게 근심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꿈이자 메시야였다. 이스라엘의 왕, 로마제국을 물리치실 분! 가정과 생업을 내려놓고 따랐던 분. 인생의 목적이자 전부였다. 그 예수님이 그들을 떠난다고 하실 때 그들은 당혹스러웠고 근심했다. 그들의 소망이 무너졌고 목적을 상실했다. 우리가 기대한 인생의 계획이 사라지고 아무 의미가 없어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본문은 마지막 만찬을 나누고 몇시간 후 대제사장에게 예수님이 체포되기 전 유언이자 고별설교이다. 십자가의 죽음을 얘기했을 때 베드로는 끝까지 따르겠다 맹세하지만 닭 울기전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음을 짓눌렀던 두려움이 이제는 근심이 되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제자들은 괴로움과 고통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다.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릴 때,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겪을 때 사람들은 위로해 준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거야! 심리학자는 말한다. 과거의 상처가 현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현재의 삶에 소망이 없어진다.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아들러는 나의 상처와 이별하는 용기, 과거의 상처가 더 이상 나를 괴롭히도록 하지 않겠다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나의 의지, 나의 용기. 세상의 관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너 자신을 믿으라고 하지 않으신다. 주님을 믿으라고 하신다. 어떻게 하늘에 계신 주님이 우리의 위로, 힘이 될 수 있는가? 고난 가운데 서 있을 때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으라고 하신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와 결정이 아니다. 예수의 영, 성령님이 거하는 삶은 예수를 구원자로 고백한다. 그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거하듯이. ‘너희 자신을 믿지 마. 나를 믿어!’

*새로운 능력을 입고 극복하는 방법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하늘에 우리의 거처가 있다고 하신다. 제자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에 예수님은 저세상 이야기를 하고 계신다. 예를 들어 실직을 당한 가장이 있다고 하자. 구직 중인데 잘 안 풀린다. 점점 걱정이 쌓여간다. 어떻게 하나? 이때 누군가가 ‘뭘 걱정하시나요? 하늘에 처소가 있는데요.’ 라고 한다면 현실적인 위로가 되는가? 현실적인 문제는 현실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본다. 예수님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려고 천국을 진통제로 처방한 것이 아니다.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

무슨 뜻일까? 거처가 없었는데 만들러 간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버지의 집에 들어갈 길이 닫혀 있지만 그 길을 활짝 열어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하러 간다는 뜻이다. (히10:19.20) 우리를 위해 열어 놓은 새 길. 죄인을 막기 위한 지성소와 성소 사이의 두꺼운 휘장. 예수님이 자신의 육체를 찢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새롭게 개통하셨다.(ex인천대교 개통) 길이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활짝 여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올 자가 없다고 하신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자신의 인격에 대해 말씀하신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내가 해결책이다. 예수님의 배타적인 선언! 모든 종교가 진리를 구하고 있다. 왜 기독교만 진리라고 하지? 산 정상에 이르는 길은 많은데?? 거부감을 준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호하게 선언하신다. 이 말이 진리라면, 참이라면, 거부감을 준다해도 우리는 이 선언을 수용해야 한다.

*최초의 아버지의 집, 에덴동산

죄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인간은 놀라운 세 가지의 특권을 누렸다.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매 순간 친밀한 교제를 할 수 있었다. 참된 하나님에 대하여 모든 진리를 알았다. 영원한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다.

인간의 불순종(선악과 사건) 이후 에덴에서 쫓겨났다. 그 결과 모든 특권이 사라졌다. 인간은 죄인이 되었고 하나님과 단절/ 진리를 들어도 깨닫지 못하거나 거짓 진리가 대신했다/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내가 내 인생을 좌지우지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는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다’ 죄인은 육체의 죽음 그 이후 영원한 죽음, 영원한 형벌을 받는 존재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죄인을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자신의 생명으로(육체로) 그 길을 여셨다. (히10:20) 그 길은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다. 그 육체는 예수님이다.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육체가 찢어짐. 내가 곧 길이라는 선언이다. (구약) 선지자를 통해 진리를 증거했다. (신약) 예수님은 진리이다. 곧 진리 자체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도그마가 아니다. 종교적인 교리가 아니다. 사랑이다. 죄에서 자유케하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인격이다. 진리가 되신 궁극적인 목표는 생명이다. 주시고자 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하나님은 그리움에 연민하는 아버지가 아니다.

'낡은 비디오테잎을 되감듯이 되돌아간다면 나는 펜을 내려놓고 두 팔을 펴고 너를 안아줄거다. 굿나잇, 민아야. 잘자라고.'(이어령)

하나님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다. 우리를 위해 하늘을 예비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천국에 이르기까지 어려움 가운데 안전히 붙잡도록 진리가 되신다.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게 하는 영원한 생명이 되신다.

*제자들과 삼 년의 공생애의 시간을 보냈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몰랐다.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 하였을 때 제자들은 불안과 고통에 빠졌다.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며 하늘나라의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해 주신다. 그 뜻은 예수님의 몸이 찢기듯,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을 만들어주신다는 의미였다. 길과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이 곧 예수님의 인격이다 라는 말씀이 새로웠고 그 깊은 의미를 좀 더 묵상하고싶다. 예수님은 영원한 즐거움이 되는 천국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붙잡아야 할 진리가 되어주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 중 하나가 '함께하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죄인인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을 열어주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또한 매일의 삶 가운데 붙잡아야 할 진리가 되어주심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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