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추수감사절 특별부흥사경회 제1과 발제

작성자
윤휘종
작성일
2021-11-22 00:21
조회
332
*예비적 주의: 글을 읽기에 앞서, 본 글은 설교자의 말씀을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그대로 옮긴 발췌문이 아니라, 듣는 자가 들려온 말씀을 능동적으로 상고하여 재구성한 발제문임을 고려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2021년 11월 21일(주)

 

추수감사절 특별부흥사경회 <잃어버린 천국언어를 회복하라> 발제

 

강사: 김덕신 목사님

 

제1과: 잃어버린 천국언어를 회복하라

 

들어가며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4:11)

우리가 말을 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 우리의 말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만약 누군가의 말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지 않으신다면, 그는 자기 영광을 위해 말하는 자이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 영광을 위해 말한다. 따라서 말을 줄여야 한다. 교회의 모든 문제는 말 때문에 벌어진다.

 

1. 설교자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닌가? 왜 그런가?

설교와 우리의 신앙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히 연관되어있다. 그러므로 "설교"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설교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설교에는 설교를 듣는 자가 있고, 설교를 말하는 자가 있다. 설교자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를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 없이 전달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설교자이다. 반대로 나쁜 설교자는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자이다. 우리는 그 예시를 사도행전 13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21)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22)

사울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세우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온전히 전하는 다윗을 향하여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칭찬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는 어떤 설교인가? 이를 위해서 데살로니가전서 2장을 참조해보자.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5)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6)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9)

위의 본문에 나타나는 "우리"는 바울을 비롯하여 말씀을 전파하는 사역자를 가리킨다. "너희들"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란 "아첨의 말" 혹은 "탐심의 탈"을 쓰지 않은 말이다.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쓴 자를 구약에서는 거짓 선지자라 부르고, 신약에서는 거짓 교사라 부른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는 "하나님의 복음"을 담고 있다.

좋은 설교는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입술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설교가 좋은 설교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하나님과 예레미야 사이의 대화를 참조하자.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1:5)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1:6)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렘1:7)

그렇다. 좋은 설교란 하나님이 명한 것을 그대로 전하는 설교이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그 입술에 하나님의 언어가 담겨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설교가 하나님의 복음을 담고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이를 위해서 베뢰아 사람들을 참조하자.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17:11)

설교는 설교자의 몫만 있지 않다. 설교에는 청중의 책임도 있다. 그것은 바로 들려온 말씀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지, 그러하지 않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성경을 상고해 보는 것이다. 그렇다. 설교자가 말씀을 전했으니,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성경을 통해 점검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성경을 기준으로 분별하는 것이지, 절대로 내 생각을 기준으로 분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설교는 아파야 한다. 듣기에 달콤한 말씀만 받고, 아픈 말씀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아프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산다.

그렇게 상고한 후, 우리는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받아야 한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느니라"(살전2:13)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우리 안에 말씀이 역사한다!

그럴 때, 다음의 결과가 나타난다.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행17:12) 그 결과는 바로 부흥이다.

왜 내 삶에 변화가 없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듣기 때문이다.

 

2. '성경을 성경으로...'의 법칙을 아십니까?

모든 성경에는 '사각지대'가 있다. 사각지대란 무엇인가? 바로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공간을 말한다. 말씀에는 즉각 누구에게든지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반면에 보이지 않고 숨어 있는 부분도 있다. 그렇게 숨겨져 있는 부분은 또 다른 말씀 속에서 찾아야 한다.

다음의 말씀을 통해 '성경을 성경으로...'를 구체적으로 이해해보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위의 말씀에서 즉각 누구에게든지 보이는 부분은 바로 순종이다. 우리는 위의 말씀을 통해 "아, 순종해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의 말씀의 사각지대는 바로 "순종이란 무엇인가"이다. 위의 말씀은 "순종하라"고 말씀하지만, "순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순종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또 다른 말씀을 참조해야 한다. 다음의 말씀이 우리에게 "순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6:46)

그렇다. 순종이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삶이다.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삶이 바로 순종하는 삶이다.

 

3. 문제 2번의 법칙으로 다음 말씀을 설명해 보시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8)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29)

27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28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을 주신 이유가 사명(정복하라, 다스리라)을 잘 감당하기 위함임을 가르쳐 준다.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이 받은 복을 생각해보라. 복과 사명은 연결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사명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복은 저주로 바뀐다.

29절은 우리가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공급하실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보통 거꾸로 생각한다. 공급을 받고 난 후에, 사명을 감당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맞지 않다.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 이는 또 다른 말씀도 지시하는 바이다.

"(1)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2)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1)은 사명이고, (2)는 공급이다. 창세기 1장 27-29절과 마태복음 말씀이 서로 통한다. 마태복음이 말하는 바도 사명을 먼저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공급하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염려란 무엇인가? 스스로가 공급을 책임지려 할 때 일어나는 감정이다. 공급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내가 하나님의 영역을 대신하려는 것이 바로 교만이다.

 

4. 다음 말씀이 주는 말에 대한 교훈을 설명해 보시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2:23)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창세기 2장과 3장 사이에 가 들어왔다. 죄는 언어의 변화를 가져왔다. 죄 짓기 전의 언어는 감사이다. 죄 지은 이후의 언어는 원망이다. 죄 지은 인간의 언어에는 감사가 사라졌다. 그 결과, 연합이 깨지고, 공급이 상실되었다. 천국의 언어, 즉 감사를 회복해야 한다. 감사란 나의 모든 나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 호흡마저도 주의 것이다! 당연한 것은 없다. 내 힘으로 이룬 것은 없다.

천국 언어와 세상 언어는 서로 외국어처럼 다르다. 천국 언어에 익숙하지 않으면, 마치 외국어를 배우듯이 천국 언어를 배워야 한다. 천국 언어를 배우지 않은 채로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없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1:21)

위의 말씀은 '이방인의 불경건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렇다. 감사하지 않는 것은 이방인의 속성이다. 내가 감사하지 아니하면, 나는 천국 백성이 아닌, 세상 나라에 속하는 자로 전락하고 만다.

 

5. 제자들의 근심에 대한 예수님의 해결책은 무엇이었습니까?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6-7)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16:22)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0-41)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실제로,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제자들의 삶은 완전히 뒤바뀐다. 그렇다. 2000년 전 제자들의 근심이나, 오늘날 우리의 근심이나 똑같은 근심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해결책도 같다. 해결책이란 바로 성령이다! 우리의 만 가지 근심에 대한 해결책은 오직 성령이다!

 

6. 다음 말씀을 통해 언어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을 설명해 보시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18-21)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6-17)

성령 충만과 말씀 충만의 결과가 동일하다. 성령 충만이 곧 말씀 충만이다. 양자는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말씀을 통해 성령이 역사한다. 말씀은 곧 진리인데, 성령이 진리의 영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 말씀이 있다.

말씀 혹은 성령이 충만해야 우리의 언어가 회복된다. 감사의 세 가지 요소로 '무엇을', '언제', 그리고 '누구에게'가 있다. 무엇을 감사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월급이 많든지 적든지, 부모님이 존경받을만 분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무슨 일에든지, 그 어떤 일에든지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언제' 감사하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항상 감사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감사의 대상이다. 감사의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감사의 대상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감사를 잃어버린 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다. 세상 사람도 감사할 수 있다. 그들도 그들의 부모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감사, 기독교적 의미에서의 감사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감사의 대상이 하나님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사의 대상은 어디에 있는가? 만약 우리의 감사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 있다면, 우리는 기독교적인 감사를 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해서, 사람에게 감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면, 자연스럽게 내 옆에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사람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다.

진정한 감사란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전인격적 선언이다. 만일 내가 '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면, 하나님을 불쌍한 분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구제의 대상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이다.

세 줄 요약: 죄 때문에 천국 언어를 잃어버렸다. 천국 언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 말씀 충만이 필요하다. 입술에 하나님의 언어, 즉 감사가 있어야만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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