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톨트 브레히트, 나 살아남은 자

작성자
윤휘종
작성일
2021-11-11 11:47
조회
602

Ich der Überlebende

Bertold Brecht


Ich, weiß natürlich : einzig durch Glück.
Habe ich so viele Freunde überlebt. Aber heute nacht im Traum.
Hörte ich diese Freunde von mir sagen : "Die Stärkeren überleben."
Und ich haßte mich.

 

나, 살아남은 자

베르톨트 브레히트


나는 본능적으로 안다. 단지 운이 좋아서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오늘밤 꿈에서

친구들이 나에게 하는 말이 들려왔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그리고 나는 내가 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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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시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직역하자면, <나, 살아남은 자>이다. 브레히트는 세계 1차 대전 중, 육군병원에서 위생병으로 근무했다. 그는 아마도 전쟁의 참혹한 폭력 속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애통한 마음과,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살아남은 자기 자신을 원망하는 마음을 위의 시에 담은 것 같다.

헤겔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는 자유의 확장"이다. 과거에는 백인 남성만이 자유로웠다. 백인 남성 외에 이방인, 노예, 여성, 어린이는 자유롭지 못했다. 그렇게 제한된 자유는 인류의 역사가 진보함에 따라 흑인에게도 확대되고, 노예에게도 확대되고, 여성에게도 확대되고, 어린이에게도 확대되고, 심지어 오늘날에는, '동물권'이라는 단어도 등장할정도로, 동물에게까지 그 자유가 확대되고 있다.

이성은 자신의 목적, 즉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진보하는 과정에서 교활하게도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는다. 이성은 사람들을 앞세워 자신의 뜻을 이룬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희생당한다. 사람들은 체스판의 말이고, 이성은 말을 움직이는 존재이다. 예를 들어, 이성은 노예해방 위해서 링컨 대통령을, 흑인해방을 위해서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를, 한국의 노동자를 위해서는 전태일 열사를 희생시켰다. 이것을 헤겔은 "이성의 간지"(List der Vernunft)라고 부른다.

그렇다. 내가 지금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죽음 덕분이다. 지금 내가 누리는 자유는 선조들의 희생, 예를 들어, 독립 운동가, 참전용사, 노동 운동가, 민주화 운동가의 희생 없이는 불가능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보면,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후, 천사의 도움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된다. 이후, 예수님은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가던 중, 어느날 예수님은 문득 십자가를 떠올리시고,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지 못했음을 자책하며, 크게 놀라신다. 그렇게 놀라며 예수님은 꿈에서 깨어난다. 이 모든 것은 꿈이었다. 천사인줄 알았던,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한 존재는 실은 사탄이었다. 십자가에서 내려가고자 한 마음이 사실 최후의 유혹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여전히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예수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다. 비록 소설이지만, 만약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시지 않고, 평탄하게 살아가셨다면, 어떠셨을까? 아마도 예수님께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겪으셨을지도 모르겠다.

도전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크게 드는 요즘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죽기 전에 후회가 없을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감당하며, 편하게 살 것인가, 죽더라도 부르심에 응답할 것인가? 나는 모른다.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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