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예.누.1)(요6:30-35)

작성자
김미정
작성일
2024-02-28 04:13
조회
111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0-35)

*오병이어를 행하신 예수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을 거부한다. 예수님 시대에도 랍비나 선지자로 인정하지만 하나님으로는 믿지 않았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은 오천명을 먹이시는 사건을 행하셨다. 이 표적을 보며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 제2의 모세로 여긴다. 메시야가 오면 만나를 내려 먹이실 거라고 믿고 있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대부분 땅이 없는 가난한 소작농이였다. 농사를 짓지 않아도 (수고도 하지 않고, 땀 흘리지 않고)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큰 희망이였다. 인간은 에덴 동산의 범죄 이후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했다.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인류의 역사는 빵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전쟁의 역사는 양식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였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된다면 처자식 먹여 살릴 걱정이 없어지는 것이였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땀을 흘리지 않고 살수만 있다면... 부동산, 재테크, 비트코인, 투자, 투기... 땀 흘리지 않고 살고 싶고 미래를 대비하고 싶다.

*[팡세] 파스칼

‘인간의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있다. 그 구멍의 깊이와 넓이를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채운다.’ 이 말은 즉 인간은 영원한 존재라는 뜻이다. 썩어질 것으로 영원한 허기를 채울 수 없음에도 인간은 썩어질 것으로 영원한 것을 채우려 한다. 우리가 혼신을 다해 최선을 다하는 일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썩어질 것인지, 영원한 것인지 보아야 한다. 뼈다귀로 영혼의 허기를 채우려 하기 때문에 채워지지 않는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허기를 느낀다면 세상의 것으로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떡이요 영원한 생수이신 예수님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허기와 갈증을 느낄 수 있다.

*영양실조

‘영양실조입니다.’ 오래전 드라마에 나왔던 대사들. 오늘날 사회에서 없어진 병. 인간은 굶주리면 죽는다. 우리는 먹어야 하지만 먹기 위해 살지는 않는다. 먹기 위해서 사는 사람, 돈을 위해서, 성공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있다. 동물은 배가 부르면 사냥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영적인 허기를 달래기 위해 썩어질 양식을 얻기 위해 분투한다. 이것이 하나님 밖에 있는 인생이다. 의식주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는 아니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영원한 것인가? 썩어질 것인가? 분별해야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만일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얻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다면 ‘그것을 모두 얻어도, 결국 죽음을 맞이하며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을 얻기 위하여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빵에 더 환호했던 오천명의 부탁

능력의 근원이신 예수님. 예수님이 진짜 복이 되신다. 신앙의 심각한 문제는 빵을 복으로 여기는 것이다. 예수님 내 병을..../ 내 자식을....응답이 없으면 주님께 실망한다. 기도의 응답을 참된 복으로 여긴다면, 예수님은 빵을 구하기 위한 도구와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상숭배이다. 우리는 연약하므로 빵을 복으로 여긴다. 물론 빵도 필요하지만 예수님이 빵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내가 너의 참된 양식이 되고자 왔다.’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표적을 주십시오’

요청했던 그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직언하신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주리지 않는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 이 말씀 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조차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기적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는 증거로 기적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자연 질서 속에서 살아간다. 기적은 자연 질서를 넘어서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사건이다. 거친 풍랑을 멈추게 하시고, 물 위를 걸으셨다. 자연 질서가 정지된 듯. 이것을 기적이라 하지 않고 표적(sign)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드러낸 것. 그것을 표적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자연의 질서를 알 수 있다. 눈 먼 자를 고친 예수님, 죄를 범하기 전에는 눈 먼 자가 없었다. 오병이어의 표적.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질서를 보여주신 것.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양식을 위해 땀을 흘릴 필요가 없었다. 죄를 범하기 전의 평범하고 자연스러웠던 것을 표적으로 보여주신다. 이것이 내가 회복할 하나님의 나라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성자 예수님. ‘내가 인간의 타락 전, 죄가 없는 존재로 회복시키기 위한 생명의 떡이다.’

*믿음

나를 믿는 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 이것이 믿음이다. 어떻게? 충격적이고 끔찍한 말이다. 예수님은 장차 죽으실 것을 아셨다. 십자가에서 빵이 찢기듯 찢기고, 피를 다 흘리셨다. 왜? 태초의 완전한 모습으로 회복시키고자 내려오신 생명의 떡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 예수를 받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님의 살이 찢김(나를 대신하여), 예수님의 피 흘리심(나를 대신하여). 예수님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다. 이것을 매일 묵상해야한다. 가슴 절절히 묵상하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우리는 감격하며 살 수 있다.

*영원한 양식이 되기 위하여

예수님은 빵을 주시기 위하여 오심이 아니라 영원한 양식이 되기 위하여 오셨다. 인생의 고통, 우리의 필요(needs)도 응답 되어야 한다. 설사 그 고백들이 응답 되지 않더라도 빵이 복이 아니라 예수님이 복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탕자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유산을 다 탕진한 아들이 깨달은 것은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이 아들을 보자 죽었다 살아난 아들이라 하며 새 신을 신기고 새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운다. 또 잔치를 벌인다. 돌아온 아들은 모든 필요를 공급받는다. 아들은 비로서 깨닫는다. 재산이 복이 아니라 아버지가 복임을!!!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시리즈1 '생명의 떡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평소 궁금했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의미를 비로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표현이 정말 좀 섬뜩하다라고 생각되었는데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대신한 죽음이요,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고 피 흘림심이 나의 죄를 대신한 십자가의 사랑이였음을  주일 설교 말씀을 통해 묵상했습니다. 그 사랑의 아버지가 나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고 회복시키심을 감사드립니다. 오직 주님만이 복이심을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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