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예.누.5)(요11:17-27)

작성자
김미정
작성일
2024-05-06 19:08
조회
35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11:17-27)

*기적과 표적

①기적:초자연적인 사건. 과학, 이성으로 밝히기 어렵다. miracle.

②표적: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하나님 나라를 살짝 드러내는 것.

성경은 기적이라 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본래의 기능(자연 질서)를 보여주는 사건. 하나님에게는 너무 평범하고,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다.

*가족이 병들었을 때

우리는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진심일 것이다. 생명이 꺼져갈 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 한다. 하지만 슬픈 결말을 맞이하고 거대한 고통으로 우리의 믿음은 조각난다. 고난 가운데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응답이 없을 때 해피엔딩이 아닐 때,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에 대해 오늘 본문이 말해준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사랑은 움직인다. 예수님께 요청할 때만 해도 즉시 와서 살려주실 것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긴급한 호소 당시 예수님은 요단 동편에 계셨다. 외면하시고 이틀을 지체했다.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되었을 때야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예수님이 거절한 시간은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는 기대와 소망이 무너지는 시간이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은 뒤 3일 동안 그 영혼이 시신 위에 떠있는다고 믿었다. 지금은 가능성이 없다. 불가능한 상태이다. 실낱같은 희망이 사라졌다.

*인생의 막다른 절벽에 설 때

강청이 지연, 거절되있을 때 주님을 향한 믿음이(기대가) 무너진다. 긴급한 도움이 필요할 때, 응답이 거절되면 믿음은 실망/원망/분노/회의로 바뀐다. 현실도 힘들지만 신앙도 암흑기에 빠진다.

*예수님의 지연은 사랑의 지연, 사랑하시기에 지체하였다 (알렉산더 맥클라렌)

어떻게 지연이 사랑이 될 수 있을까?

*성인이 되어서도 필요와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우는 사람이 있다.

인간의 성숙은 개인의 필요가 충족되지 않거나 지체되거나 거절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달려있다. 성숙되면 수용한다. 기도에 응답되지 않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성숙을 알 수 있다.

*자녀의 성숙을 실패하게 하는 방법(찰스 스펄전)

힘든 일을 시키지 말라/어른이 되어도 달래주라/돌보는 사람을 붙여주라/발에 흙을 묻히지 말라/ 죄를 지어도 동정해주라/ 낙담하거나 힘든 일을 피하게 하라/ 결과: 패륜아가 된다.

*사회의 비극

자신의 충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영적 성숙은 욕구와 필요의 충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물과 아픔, 거절이라는 좌절을 통해 기다림, 분노, 실망, 신앙의 회의 과정을 통해 자라난다. 도대체 언제까지입니까? 정말 나를 사랑하십니까? 살아계십니까? 개인의 필요와 욕구가 충족되지 않음은 모두에게 힘들다. 기다림의 시간은 유아기적인 수준을 넘어서 나를 사랑하심을 한결같이 믿는 “성숙한 신앙”으로 우리는 연단시키는 주님의 의도된 사랑이다. 지연은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여전히 우리를 변함없이 한결같이 사랑하신다. 지연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완벽한 통제 안에 있다. 완벽한 목적 안에 있다.

*그는 살겠고(=현재 시재이다. 계속해서 살 것이다)

친히 현재의 나의 삶에 승리를 보장하신다. 주님의 거룩한 능력을 인생 광야에서 풍성히 누려야한다. 너의 삶, 너의 가정, 직장에서 너 스스로 이겨내려 하지 말고 나의 부활의 능력을 누리고 향유해야한다.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그러므로)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이틀 더 유하셨다.

주님의 완벽한 목적은 무엇일까? 예루살렘에서 베다니까지 약 오리. 3km. 걸어서 한시간의 거리. 왜 성경은 예루살렘을 언급하는가? 최종 목적지가 베다니가 아니라 예루살렘이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베다니를 방문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말씀 속 예수님의 영광은 곧 십자가를 의미한다. 나사로를 살린다는 것은 본격적인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다는 뜻이다. 나사로를 살리므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 영광의 실체였다. 나사로의 썩고 부패함은 우리의 모습을 가리킨다.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베다니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영적인 죽음으로 가는 우리의 모습, 나사로의 썩은 모습, 우리의 실재의 모습이다. 죽음으로 영원한 형벌, 심판대에 서야하는 우리들.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비통히.(=호되게 꾸짖다. 크게 책망하다.) 죽음에 반감을 갖고 치를 떨며 말하다. ‘그 분의 분노가 복받쳐올랐다’ (유진피터슨) 죽음.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본래 그렇지 않았다. 죄로 인하여 죽음이 탄생했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그 죽음이 우리를 삼키게 되었다. 예수님은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의 부활,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 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셨다. 이것은 너희 삶 가운데 누려야 할 나의 놀라운 능력이다. 우리의 아무리 큰 고통과 어려움에 있을지라도 예수님은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의 영원한 능력이 되신다. 죽음 이후의 삶 뿐아니라 우리의 현실 세계에서도, 고난의 삶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능력을 향유하기 원하신다.

*오늘 말씀을 통해 '기도 응답의 지연'에 대해 묵상하게 되었다. 사랑하면 귀 기울여 듣게 되고 무엇인가 해결을 위한 움직임은 당연한 순서이다. 하지만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들으신 예수님은 지체하셨고 무덤에 장사된 이후에야 오셨다. 말씀 속 예수님의 베다니로 향한 발걸음은 바로 예루살렘의 십자가를 향하는 발걸음의 시작이였다. 이것은 나사로를 살리는 발걸음이자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십자가의 대신 죽음으로 살리는 발걸음의 시작이였다. 이것을 예수님은 영광이라고 표현하신다. 우리(나)를 위해 죽으시는 고통이 어떻게 예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을까? 예수님의 그 사랑의 크기는 짐작조차 어려운 것 같다. 그 크신 사랑은 나사로를 살리셨고, 죄인인 나를 살리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은혜를 허락하셨다. 하나님, 십자가의 죽음으로 생명을 허락하시고 자녀로 삼아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때로 나의 생각과 다른, 더딘 기도의 응답도 하나님의 큰 사랑임을 고백하며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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